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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시라타가하라 전투(2) 사카이 타다츠쿠의 토비가쓰야마 성채 기습

일본 전국시대;

시라타가하라 전투(2

사카이 타다츠쿠의 토비가쓰야마 성채 기습



 덴쇼 3년(1575년), 다케다 가쓰요리의 본대가 시타라가하라를 향한 뒤에, 사카이 타다츠구가 토비가쓰야마  성채에 기습을 걸어에 출발했습니다.


 3만에 달하는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이 시타라가하라에 진을 치고 성채나 망루를 쌓고 있는 와중에, 다케다 본대 내에서는 계속해서 군의를 가집니다. 퇴각인가, 결전인가에 대해 논의를 계속하나,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이 무려 3만에 달하지만 그에 비해 다케다군 절반 정도인 1만 5,000이었기 때문에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 야마가타 마사카게등 신겐때부터 다케다를 섬긴 중신들은 모다 퇴각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가쓰요리의 측근인 아토베 카쯔스게(跡部勝資)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토베 카쯔스게 일러스트



다케다측이 보기에는 시타라가하라에 도착해도 전혀 공격해 오지 않고, 성책을 쌓기만 하는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후에 또다시 새로운 원군이 올 가능성도 있는데다가, 이쪽에서 보기에는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사기가 낮고 약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다케다군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한번도 진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또 다른 원군이 오기 전에 사기가 낮은 오다 토쿠가와 연합군을 공격한다고 결정합니다. 이러기 위해서 다케다군은 일각이라도 빨리, 전장에서 유리한 전투 대형을 취해야 합니다.



시라타가하라 전투 전황도


 가쓰요리는 나가시노성은 2,000의 군사로 성을 포위시키고 성의 동쪽을 흐르는 오노가와(大野川)의 강변에 있는 토비가쓰야마(鳶ヶ巣山) 성채(砦)에 카와쿠보 노부자네(河窪信実) 등 1,000명을 두고 스스로 본대의 주력 12,000을 인솔해 토요가와(豊川)를 건너, 시타라가하라를 향해서 진군했습니다. 한편 같은날,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에서 열린 군의의 자리에서, 이에야스의 중신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가 토비가쓰야마 성채를 기습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노부나가는 이 제안에 코로 웃으며 '우책'이라며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군의가 끝나자 마자 그를 은밀히 불러 그 작전을 결행하게 합니다. 혹시 모를 스파이를 견재한 것이었지요. 이 책으로 노부나가는 다케다의 퇴로를 끊으려 한 것 같습니다. 또는 더 잘되면 나가시노성까지 한큐에 지킬 수 있는 명안이었지요. 마츠다이라와 미카와의 군세에 노부나가의 군세가 더해진 총원 4,000명의 군사는 몰래 시라타가하라를 넘어 이동합니다.



사카이 타다츠구



 다음날 새벽 성채를 지키는 다케다측의 관심은 정면에 있는 나가시노성이었습니다. 그들의 배후에 적이 다가오고 있는 일은 눈치채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전의 날이 날이 밝았습니다. 새벽과 함께 단번에 습격 개시해 총성과 산이나 골짜기에 메아리치고 허를 찔린 다케다군은 혼란에 빠져 근처에 있던 몇개의 성채와 제휴를 취하는 일마저 못한 채로 장수가 죽고, 병사들은 흩어져 버립니다. 이 전투로 다케다측의 사기는 내려가고, 퇴로는 끊어져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