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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조선과 관계수복의 노력, 포로송환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조선과 관계수복의 노력, 포로송환



 게이쵸 5년(1600년) 3월 2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소 요시토시(宗義智)등이 조선에 강화를 요청해, 포로 160명을 송환했습니다.



소 요시토시 초상화



 아마쿠사 제도를 포함한 히고 4군의 영주 고니시유키나가, 나가사키 봉행인 데라자와 히로타카, 대마도 주 소 요시토시의 영지는 모두 조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의 처리의 주도를 그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의 야욕이 낳은 조선 침략은 두 차례에 걸쳐 실패하고, 결국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임진왜란 종결) 그 유언에 따라 철퇴하게 됩니다.그리고 일본 내의 정세가 급변해 포로 송환이 이루어진 게이쵸 5년 중에 세키가하라전투가 있기도 했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9월 15일 하루였으나, 그 징조는 이시다 미쓰나리 습격(이시다 미쓰나리 습격) 때부터 보여 왔습니다. 이렇게 불안한 정세에 강화회담은 일단 중단됩니다.


 다음해인 게이쵸 6년(1601년) 사실상 정권을 잡은 이야에스의 의지로, 소 요시토시에 의해 강화회담이 재개됩니다. 사실 그는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에 속했으나, 큰 행동을 보이지 않아 죄를 용서받은 그룹 중 한 명이었습니다. 어쨌든 입장이 좋지 못한 그는 부인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 마리아와 이혼하고 이 교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다이라노 토모모리(平知盛)이후 17대로 대마도를 다스리던 그는 가문의 존속과, 경제적으로도 대 명, 대 조선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이 회담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



 하지만 거의 국토 전체가 일본군에게 희롱당한 조선이 쉽게 강화에 응할리는 없었습니다. 이윽고, 이야에스가 정이 대장군에 오르고, 그 이듬해 게이쵸 9년(1604년)에 사명대사가 탐적사(探賊使: 도적을 탐색하는 직책)로 대마도에 파견되었습니다. 소 요시토시는 사명대사에게 요청하여 교토로 부르고, 이야에스와의 면담을 성사시킵니다. 그리고 이야에스는 자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다르게 야욕이 없음을 사명대사와 1,400명의 포로를 송환함으로서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명대사를 통신사로 대접해, 아직 도요토미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일본 국내에 자신이 외교마저 관장하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음을 알린 것입니다. 게이쵸 12년(1607년) 조선에서 통신사를 보내, 국교의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