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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을 결집시키다(1) 요시쓰구 설득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시다 미쓰나리, 세력을 결집시키다(1) 요시쓰구 설득



 게이쵸 5년(1600년) 7월 11일, 사와산성(佐和山城)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오오타니 요시쓰구(大谷吉継)가 회견해 군사를 일으킬 결의를 했씁니다.



이시다 미쓰나리 초상화



 오오타니 요시쓰구의 관직 전까지의 생애는 수수께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오오토모가의 가신인 오오타니 요시쯔구(大谷吉継)의 아들로 분고에 태어나 16세 때에, 하리마 평정 중에서 히메지성에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를 통해 관직에 올랐다고 하나, 연령적으로 모순이 있어, 최근의 연구에서는 시가현의 요고쵸(余呉町) 출신이라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전투를 동경하는 용감무쌍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용 이외에도 사무적인 재능이 있었고, 미쓰나리와 사이가 좋은 점도 있었기에, 사무의 방면에 돌려지는 것이 많았습니다. 시즈가타케 전투(시즈가타케 전투)의 때도, 타이마쯔(松明: 횃불)이나 자금의 준비를 명령받았기 때문에, 전장인 시즈가타케에는 도착이 늦어져, 이렇다 할 무공을 세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으의 재능은 측량이나 재정 등 영토 경영에 발휘되어 전시 하에서도 무기, 병량의 조달이나 수송의 준비등의 임무를 보기 좋게 해내는 숨은 공로자로서 활약해, 주위의 신뢰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시쓰구를 병마가 덮칩니다. 요즈음의 한센병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그 병은 차츰 심해져, 이윽고 그 시력을 잃어 은거를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죽고,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어 그날 밤, 이시다 미쓰나리(이시다 미쓰나리 습격)가 습격당합니다. 이에 까사스로 살아남아 거성인 사와산성에 근신 처분이 내려진 그는 도쿠가와 이야에스의 야망을 깨달았습니다.


 이어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상경 거부로(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야에스는 6월 17일 후시미성을 떠나 아이즈를 정벌하러 나섭니다. 이어 7월 2일 이야에스는 에도성에 입성합니다. 동시에, 미쓰나리는 사와산성에 요시쓰구를 불러 자신의 의중을 털어 놓습니다. 사실 요시쓰구는 이 때, 이야에스의 정벌에 참가하기 위해 토우센도우(東山道)의 동쪽을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마 여기서 요시쓰구는 미쓰나리의 청을 거절했을 것입니다. 일단 이야에스군에 참가했던 부대를 이탈해 7월 11일에 다시 사와산성을 찾아 옵니다.



병으로 얼굴을 감추고 다녔던 요시쓰구



 이 심경의 변화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히데요시 주최 다과회의 이야기 입니다. 오사카성의 다실에서 행해진 다과회에서, 요시쓰구에게 챠완(茶碗)이 돌아 옵니다. 그런데 그의 고름이 차에 떨어져 버립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히데요시가 하사한 차라 돌아가며 마셔야 했기에, 누군가는 마셔야 하나 그의 고름이 떨어져 버렸으니 분위기는 일순간에 냉랭해 집니다. 이때 미쓰나리가 나서 차완을 취해 다 마셔 버리고 히데요시에게 '목이 말라 다 마셔 버렸습니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잊지 못한 그가 미쓰나리를 도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미쓰나리는 이미 병이 무거워져 말을 타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젊은 날에 이루지 못했던 용감무쌍한 무장을 한 번 해 보고 싶었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결과를 아는 우리가 보기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향하는 듯 합니다만, 다음날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 안고쿠지 엔케이(安国寺恵瓊)를 끌어들이고, 모리 데루모토를 서군에 대장에 앉혀 이때의 승률은 거의 5:5 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시쓰구는 서군으로 세키가하라에 참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