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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의 서막 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의 서막 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게이쵸 5년(1600년) 4월 1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상경 요청을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거부했습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 초상화



 게이쵸 3년(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뒤에, 그의 유언 대로 도쿠가와 이야에스를 비롯한 오대로와 이시다 미쓰나를 중심으로 하는 오봉행에 의한 합의제로, 정권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무시하고 여러 다이묘와 사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거나 독단으로 마음에 드는 다이묘 스스로의 파벌에 넣으려고 해서, 오대로와 오봉행의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오대로의 나머지나 오봉행 종종 연서(連署)를 써 이에야스의 행동을 비난 합니다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히데요시 은고의 미쓰나리가 이야에스의 암살을 몇 번이나 기도하자, 이야에스는 결국 도요토미 가내의 갈등을 이요앟기로 합니다.


 미노의 요도도노를 중심으로 뭉친 문치파, 그리고 오와리의 기타노만도코로를 중심으로 뭉친 무투파의 갈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절부터 있었습니다. 이들의 분열은 바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가속합니다. 이 때, 미쓰나리가 이끄는 세력은 히데요시의 명으로 재진봉행(在陣奉行)이라고 하는 역할을 맡아 전황을 분석해 일본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전하는 직무였습니다. 그야 충의를 다하며 날카롭게 분석했지만, 무투파의 무장들은 칼을 들어본적도 없는 애송이에게 분석이 된다는 것에 굴욕을 느껴, '이들의 분석이 잘못되어 패퇴했다'라고 주장하고, 반대로 미쓰나리가 이끄는 문치파는 '우리의 분석을 저쪽이 믿지 않았기에 패배했다'며 싸우기 시작하지요. 관동에서 군사를 이끌어 큐슈까지 왔지만 우연히 현지에 출병을 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속으로 웃음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치에 환멸을 느낀 토시나가



 마에다 토시이에는 이 갈등을 잘 조율하고 있었습니다만, 이윽고 그가 죽자 그날 밤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무투파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합니다.(이시다 미쓰나리 습격) 이런 복잡한 정치상에 머리가 아팠던 오대로의 토시이에의 아들,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는 카가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에 이야에스는 '마에다 토시나가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며 카가 정벌을 천명하나, 토시나가의 필사적인 변명과 함께 자신의 어머니 마쯔(まつ)를 이야에스에게 보내 살아 남습니다. 그 다음 이야에스는 오대로의 1명인 아이즈의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목표로 정합니다.


 우에스기의 중흥을 이끈 겐신의 영지에서 쫓겨나, 아이즈의 영지를 제수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에 카게카츠가 오대로로 뽑혔기에, 그는 자신의 영지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는 이야에스의 허락을 받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카게카츠가 영민을 동원하고, 새롭게 기점이 되어야 할 고우자이성(神指城)의 축성을 시작으로 도로나 다리의 정비를 개시하기 시작하자, 이야에스가 트집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 공사에서 여러 인원이 필요해 지자 개중에 료닌(방랑무사)를 고용하기도 하고, 무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야에스는 이를 '모반의 준비'라며 상경을 요구합니다.



나오에장, 창작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토의 정비를 간신히 시작한 데다, 토호쿠의 겨울은 춥고 눈이와 쉽게 이동을 할 수 없어 카게카츠는 상경 명령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에 이야에스는 '세이쇼우 죠우타이(西笑承兌)'라는 승려에게 편지를 써, 카게카츠의 상경과 인질을 요구합니다. 이에 카게카츠의 명 참모, 나오에 키네츠구는 '갈 리가 없지 않느냐!'라는 취지의 답장을 씁니다. 이 '나오에장(直江状)'으로 인해 분노한 이야에스는 아이즈 정벌을 계획하고, 이 빈틈을 타 이시다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야에스는 이 모든 것을 예측하고 행동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무렵 후시미성의 도쿠가와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는 그의 주치의의 기록을 보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