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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시다 미쓰나리 습격당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시다 미쓰나리 습격당하다


게이쵸 4년(1599년) 윤 3월 4일, 가토 기요마사등 도요토미가의 가신 7명이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습격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낳는 도요토미 가문 내의 분쟁은, 히데요시 만년의 무렵부터 그 징조가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제일의 표적이 된 것은 다름아닌 이시다 미쓰나리였습니다. 그는, 원래 오미의 토호의 아들이었습니다. 덴쇼 2년(1574년), 아직 기노시타 도키치로라 자칭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처음으로 주어진 오미의 영지를 순방하고 있었을 때, 처음으로 받은 영지를 지나치게 열심히 보던 그는 지치고 목이 말라 차를 부탁하려고고, 문득 찾아낸 절에 들어갑니다.


이시다 미쓰나리 초상화


 차를 부탁한 히데요시에게 어린 승려가 나와, 차를 줍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단숨에 삼킨 뒤에 다음 차를 부탁합니다. 이번에 그 승려가 가져온 차는 양은 조금 적어지고, 더 뜨거웠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한 히데요시는 또 다음 차를 부탁하지요. 다음번의 차는 가져온 양이 더 적어지고, 더 뜨거웠습니다. 차는 천천히 식히면서 먹어야 맛보는 것이지요. 어린 승려는 히데요시에게 차의 여유와 맛을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히데요시는 그를 자신의 시동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이시다 미쓰나리입니다. 


 미쓰나리는 만년에 히데요시가 천하를 장악 하고 나서, 중앙집권적을 목표로 한 히데요시의 한쪽 팔이 되어 일합니다. 하지만 옛부터 전투의 무공을 무기로 출세해 온 무투파의 가신들이 보기에는, 별로 무공도 없는 관료 출세를 하고 실권을 잡아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런 질투가 더욱 커진것은, 히데요시의 측실인 챠챠가 아이를 낳아 요도성의 성주가 되어 요도도노로 불린 다음부터 였습니다. 그녀는 오미의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이기에, 오미의 문치파 세력이 그녀의 아래에 모였습니다. 그 지도자가 다름아닌 이시다 미쓰나리입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초상화



 한편, 오와리 출신의 무장들은, 오와리의 무렵부터 신세를 지고 있는 기타노만도코로(정실인 네네)를 중심으로 결속 합니다. 이쪽의 지도자는 가토 기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라고 하는 무투파 무장들입니다. 이를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분열은 바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가속합니다. 이 때, 미쓰나리가 이끄는 세력은 히데요시의 명으 재진봉행(在陣奉行)이라고 하는 역할을 맡아 전황을 분석해 일본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전하는 직무였습니다. 그야 충의를 다하며 날카롭게 분석했지만, 무투파의 무장들은 칼을 들어본적도 없는 애송이에게 분석이 된다는 것에 굴욕을 느껴, '이들의 분석이 잘못되어 패퇴했다'라고 주장하고, 반대로 미쓰나리가 이끄는 문치파는 '우리의 분석을 저쪽이 믿지 않았기에 패배했다'며 싸우기 시작하지요. 관동에서 군사를 이끌어 큐슈까지 왔지만 우연히 현지에 출병을 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속으로 웃음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그 유지를 무시하고, 다른 다이묘와 혼인관계를 맺나, 봉급을 증가시켜 자신의 지반을 굳힙니다. 그런 중에, 게이쵸4년(1599년) 윤 3월 3일, 히데요시 사후에 도요토미 가문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가 죽었습니다. 중재자가 죽은 그날 밤, 무투파의 불만이 폭발합니다. 그 다음날인 게이쵸 4년(1599년) 윤 3월 4일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아사노 유키나가(浅野幸長),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7명이, 군사를 인솔해 미쓰나리의 저택을 습격했습니다. 이 습격을 직전에 알게 된 미쓰나리는 다름아닌 이야에스의 저택으로 도망칩니다.



무투파, 미쓰나리를 습격!



 자신이 죽기전에 도요토미가에 방해가 될 이야에스를 죽이려는 미쓰나리의 시도였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런 미나리를 이에야스는 돕습니다. 만약 이야에스가 천하를 쥐려고 한다면,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하극상으로 보기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작금의 문치파와 무투파의 갈등이 심화된다면? 이것을 자신이 이용한다면? 이라는 이야에스의 계산이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미쓰나리는 봉행에서는 은퇴한 뒤로 근신 처분을 받게 됩니다. 아마 이때 미쓰나리는 이야에스의 위험성을 피부로 느끼고, 거사를 각오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 해, '상경요구를 무시하는 우에스기를 토벌한다'며 이야에스는 후시미성을 떠납니다. 그의 주치의인 이타사카 보쿠사이(板坂卜斎)에 따르면 '이야에스에게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중재자인 자신이 기나이를 비우면 반드시 미쓰나리가 공격을 할 것이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반대세력을 없애려 한 생각에서 나온 웃음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