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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 오사카의 진의 발단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호코지 종명(鐘銘)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전후에는, '전투는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며,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인 도요토미 가문에 모반을 꾀한 일이 되어, 동군의 무장들도 대부분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도요토미히데요리와 게이쵸 16년(1611년)에 니죠성(二条城)에서 회견했습니다. 그 전후로 왠지,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동군으로 배신했던 무장들이 차례차례로 세상을 떠나, 불안을 안아 '염불쓰기'는 취미에 몰두하는 이에야스였지만, 그러면서도 도요토미 가문을 무찌를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호코지 범종호코지 종명


 도요토모 히데요리 자체는 도쿠가와 이야에스의 적수가 아닙니다. 문제는 히데요시의 유산입니다. 하나는 실제로 있는 물질적, 금전적인 유산 그리고 다른 하나 형태가 없는 '히데요시의 그림자'의 유산입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으로 배신한 무장들에게, 많은 은상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히데요시 연고의 무장들을 제거하며 히데요시의 유산을 서서히 지워 나갑니다. 한편의, 천하인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절이나 신사의 수복을 잇달아 해 나갔습니다만, 막대한 유산은 좀처럼 줄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절 중 하나가 바로 호코지입니다.


 호코지의 대불 축조는 원래 도요토미 가문이 발안한 것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비원이기도 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뒤에, 히데요시의 유지를 이어 재개된 호코지의 대불 축조는 게이쵸 17년(1612년)에 간신히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게이쵸 19년(1614년)에는 범종도 완성해, 드디어 대불의 첫 공양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니죠성의 뜰에서 느긋하게 쉬는 이에야스의 귓전에 한 인물이 속삭입니다. 


'공은 히데요리공이 걸리적 거리지 않는가? 호코지의 종명을 문제삼으면 어떤가?'


'종명에? 뭐라고 써 있는가?'


'내가 저번 호코지의 종을 보았다. 거기에는 '국가안강(国家安康)'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을 문제삼으면 될 것이다.'


'국가안강이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가?'


'국가안강이란, 이야에스(家康)의 두 문자를 분단한 것이니, 당신을 저주한 것이나 다름없다.'


'과연....'



아마미, 이야에스, 히데타다의 그림



 이에야스에 이 조언을 한 사람이 바로, '승복의 재상(黒衣の宰相)'이라고 칭해지는 괴승 아마미(天海)입니다. 그는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끝낸 이에야스의 앞 갑자기 나타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습니다. 이 때 이미 70세를 넘고 있던고 노승입니다. 게다가 이에야스만이 아니고, 히데타다, 이에미쓰까지 도쿠가와 삼대의 브레인으로 강한 발언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후에 이에야스가 죽었을 때 구노산(久能山)에 매장되고 있던 유골 그의 한마디에 닛코로 옮겼다고 하는 것을 봐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거물인데, 이에야스를 만나기 전까지 그 전반생이 완전히 수수께끼에 싸이고 있었기에, '아마미는 아케치 미쓰히데가 아닌가?'라고 하는 소문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슨푸기(駿府記)」의 7월 21일에 의하면, 이에야스는 '국가안강'의 문자와 그 옆에 써 있던 '군신풍락(君臣豊楽)'의 문자를 '도요토미를 주군으로 즐겨 삼는다'라고 하는 의미라고 하며 교토 고산(五山)의 승려들을 이용해 비판시킵니다. 그리고, 히데요리에게 '사과하러 와라!'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생트집에 히데요리는 무시하고, 결국 오사카의 진이 발발하게 됩니다. 후에 이 글자를 고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을 보면, 이 사건은 정말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