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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쿠가와 히데타다, 또 다시 기리시탄 금지령을 내리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쿠가와 히데타다, 또 다시 기리시탄 금지령을 내리다



 게이쵸 18년(1613년) 12월 23일,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번째 '기리시탄 금지령'을 냈습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초상화



 일본에 크리스트교가 전래된 것은, 텐분 18년(1549년)에 온 프란시스코 자비엘이었습니다.(남만신교의 전파) 하지만 이것은 선교사가 와서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으로, 크리스트교 자체는 나라시대 전반에 일본에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나라 중 하나인 중국에 크리스트교가 전래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35년 당나라 시대에 '페르시아에서 정식 전도사들이 수도인 장안에 와, 포교 활동을 하는 일을 인정받았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어, 중국에서는 '경교(景教)' 라는 이름으로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크리스트교의 여러가지 일화가 당시의 일본에 전해진 것도 있었습니다. 쇼토쿠태자(聖徳太子)[각주:1]의 어머니가 아들을 낳아, 그를 '우마야도노 미코(厩戸皇子: 마굿간의 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예수의 탄생 전설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지요. 또, 토호쿠의 토와다호(十和田湖) 근처에 있는 '헤라이(戸来)'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의 발음이 '헤브루'와 비슷한 것이로, '그리스도의 무덤'이라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가 사실 골고다에서 죽지 않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와서 105세까지 살았다는 것이지요.



토호쿠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



 자비엘은 일본에 좋은 인상을 가지고 '일본에 파견하는 선교사는 특히 우수한 이들을 보내 주십시오.'라고 예수회에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 요청에 따라 온 뛰어난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에 의해서,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나, 다카야마 토모테루(高山友照), 우콘(右近) 부자, 고니시 류사(小西隆佐), 유키나가(行長) 부 등 많은 크리스찬 영주도 생겨갑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외국과의 무역을 위해서 신자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급격하게 일본 사회에 퍼져 간 것은 확실합니다. 일본에 전해진 당초는 불교 종파로 오인되어 '남만종(南蛮宗)' 혹은, 포르투갈어로 신부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반찬련종(伴天連宗)'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크리스트교 신자'를 의미하는 '크리스찬'이들어와 '기리시탄'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가장 박해되었던 시대에는,'鬼利至端', '鬼利死炭' 등 나쁜 이미지를 주는 글자를 썼었습니다. 급격한 기세로 일본 사회를 석권 할 것 같게 된 크리스트교는, 덴쇼 15년(1587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포한 '금교령(禁教令)'에 의해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크리스트교에 관대했던 히데요시가 여기에 와 단번에 '크리스트교 금지'를 내린 이유는 저번에 설명했었습니다.(크리스트교를 금지하다)



탄압을 피해 불상으로 위장한 마리아상


 그러나 그 수는 갈수록 증가해 게이쵸 5년(1600년)에는 75만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급격한 크리스찬 증가의 요인은 무엇인가요?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해 사회 전체가 불안과 혼란의 시기에 있었던 시대에 크리스트교는 널리 퍼집니다. 계속되는 전란,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하루에 종교에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불교는 상당히 타락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게이쵸 18년(1613년) 12월 23일 2 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번째로 '기리시탄 금지령'을 냅니다. 이윽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徳川家光)의 시대에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에 놀란 막부는 크리스찬의 탄압을 한층 더 강하게 합니다. 이 탄압은 메이지 6년(1873년)까지 계속 되게 됩니다.

  1. 일본에 불교를 받아들인 정치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