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마즈 이에히사의 류구 침공, 류구국 멸망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마즈 이에히사의 류구 침공, 류구국 멸망하다



 게이쵸 14년(1609년) 4월 5일, 사츠마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가 부하인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를 총대장으로 류구(琉球)에 침공합니다. 쇼 네이(尚寧)가 항복해, 류구국(琉球国)은 멸망했습니다.



류구국(현재 오키나와)의 위치입니다



 류큐 왕조의 혈통은 15세기 경에 처음으로 류큐 전국을 통일했다고 하는 쇼(尚)에서 시작됩니다. 그 이후 그의 혈통은 7대를 이어지다가, 분메이 2년(1470년)에 쇼 엔(尚円; 内間金丸)이 수립하는 제 '2대 쇼'로 나누어집니다. '1대 쇼'의 제6대 왕 쇼 다이큐(尚泰久)의 신하로 출세한 엔이, 제7대 쇼 토쿠(尚徳)가 죽은 것을 계기로 정권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 '2대 쇼'의 6대 쇼 에이(尚永)의 뒤를 이을 아이가 없었기에, 3대 쇼 신(尚真)의 후손으로 덴쇼 17년(1588년)에 26세에 제 7대의 국왕이 된 것이 바로 쇼 네이 입니다. 


 이즈음의 류구는 명의 산하에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역대 중국 황제는 주변 왕국에 작위나 칭호를 주어 관계를 유지하는 책봉 체제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변 왕국들도 대국에 인정되는 것에 의해, 왕국의 정통성을 내외에 인식시켜, 국내의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류구국 역시 이런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제 7대 쇼 네이도 취임한 뒤 10년 후의 게이쵸4년(1599년), 명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즈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혼란스러워 7년 후의 게이쵸 11년(1606년)이 되어 간신히 책봉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류구왕국의 마지막 왕, 쇼 네이의 모습



 류구국은 조선에도 조공을 보냈고, 일본과도 교류했습니다. 5대 쇼 겐(尚元)의 무렵까지는 사츠마의 시마즈와도 단단한 우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 겐키 원년(1570년)과 그 다음 해에 시마즈가 파견한 사절의 접대와 관련한 문제가 있어 관계가 틀어져 버립니다. 임진왜란의 군자금의 제공을 요구하거나 조공을 바치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류큐 왕조의 중신에는 섭정(摂政), 산시칸(三司官)등의 직무가 있었는데, 이 산시칸 중 한명 자나 리잔(謝名利山)등을 중심으로, 크게 반발합니다. 


 이 태도에 화가난시마즈 이에히사는 일족인 카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에 3,000의 군사를 맡겨 100 남짓의 군선에 분산해 탑승시켜 사츠마를 출항합니다. 게이쵸 14년(1609년) 3월 26일, 오키나와섬 북부에 상륙해, 슈리성(首里城)을 목표로 진군합니다. 한편, 류구국은 사실 조금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쇼 네이의 대까지 7대에 걸쳐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를 다룰줄 아는 사람이 적은데다, 활발했던 무역도 침체기를 맞은 상황이었습니다. 반대로 시마즈는 세키가하라를 끝낸지 얼마 안된, 강력한 군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류규왕국의 슈리성의 전경



 차례로 쌓이는 자국 병사의 시체의 산을 본 쇼 네이는 게이쵸 14년(1609년) 4월 5일, 마침내 항복했습니다. 불과 11일간의 공방전이었습니다. 게이쵸 15년(1610년), 쇼 네이나 지나 리잔 등은 사츠마에 연행됩니다. 쇼네이는 이 때, 처음으로 슈리성을 나왔다고 합니다. 그 후, 사츠마에서 앞으로 시마즈의 방침에 따르는 속국이 되겠다고 합니다만, 명에 유학을 다녀와 혈통도 중국계인 자나 리산은 완고하게 거부해 가고시마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쇼 네이는 슨푸에서 에도로 연행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도 대면하고, 다음해 간신히 류구 귀국이 허락되었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류구 왕국'이 존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들 민족의 의상을 입는 등,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묘소는 역대 류구국의 왕들이 잠자는 '옥릉(玉陵)'이 아닌, '우라소에(浦添)'에 묻히게 됩니다. 자신의 고향에 묻히며 그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을 숨기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일본은 1879년 '류구 처분'을 통해 당시 이미 왕국에서 번으로 강등된 류구 정부를 해산합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5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류구 정부를 해산하고 국왕을 도쿄로 압송해 형식적 작위(후작)를 내린 뒤, 이 일대에 오키나와 현을 설치했습니다. 즉, 이때까지 형식적으로나마 류구왕국은 살아 있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