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야에스의 상경요청을 히데요리가 거부하다
게이쵸10년(1605년) 5월 10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상경을 재촉했으나 히데요리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세키가하라의 전투는 게이쵸5년(1600년)이고, 오사카의 진의 발발이 게이쵸 20년(1615년)입니다. 이 사이에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습니다. 지금에야 도쿠가와가 실권을 잡은 세키가하라를 엄청난 분수령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도요토미 가문 내에 실권을 누가 잡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대로 중 가장 큰 힘을 가졌음에도, 직접 전투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발한 것입니다. 만약 이야에스가 야욕을 보였다면, 가토 기요마사등 도요토미 은고의 무장이 그를 도울리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세키가하라 전투의 불과 12일 후에, 오사카성의 히데요리와 요도도노 앞에 나아간 이야에스는 승리의 보고와 함께 '도요토미가에 충성을 맹세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서적에는 '이 세키가하라의 전투 전후에 다이묘들의 수확량이 크게 변동했다.'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승리한 동군에 속한 다이묘는 은상으로 수확량이 큰폭으로 오르고, 진 서군의 다이묘는 몰락해 료닌이 되거나 대폭으로 영지가 준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불가해한 것은 주군인 히데요리의 수확량입니다.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도요토미 가문 내의 내부 항쟁이라면, 어째서 히데요리의 222 만석이 셋츠, 카와치, 이즈미만의 65.7만석이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도요토미 가문은 여기서 일개 다이묘로 전락했다.' 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분카 9년(1812년)에 쓰여진 「폐절록(廃絶禄)」 에 의하면 겐나 원년에,'65만 7천4백석 셋슈 오사카성, 셋츠, 카와치, 이즈미 도요토미 우다이진(右大臣) 1 히데요리공 5월8일, 오사카성에서 23로 할복'이라고 써 있다고 합니다. 이 「폐절록」은 도쿠가와의 에도시대에 가문이 사라진 사람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메이지 이후에 쓰여진 「도쿠가와제봉록(徳川除封禄)」역시 비슷하게 도쿠가와가 시대에 영지가 줄어든 다이묘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65만 7천석 도요토미 우다이진 히데요리, 거성 셋츠국 셋슈군 오사카, 겐나 원년 5월 8일 오사카성 에서 전사해 제봉당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분카 6년(1809년)에 출판된 「단가보(断家譜)」역시 에도시대에 폐절한 다이묘나 하타모토(旗本) 2의 가보를 집성 한 것에는 도요토미가가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야에스의 쇼군 취임으로 끝난 것 같지만...
즉, 분카 9년(1812년) 이전의 기록에서는 도요토미가는 에도시대에 폐절된 다이묘 중에 포함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도요토미 가문이 65.7만석의 다이묘로 폐절이 된 것이 등장하는 것은 분카 9년으로, 세키가하라에서 무려 200년 이상이 지나고 나서 나온 것입니다. 세키가하라 후도 모든 다이묘는 커녕, 공가(公家)까지도 매년, 정월의 인사를 하러 오사카성으로 향한 것이 일개 다이묘일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승리 하나로 천하를 손에 넣은 것은 아니고, 그 후, 15년에 걸쳐 서서히 여러가지를 바꾸어 가 오사카의 진에서 겨우 도요토미 가문을 넘어뜨리게 된 것 가습니다. 게이쵸 17년의 시점에서도 히데요리는, 빗츄의 야마시로나 오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후에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정이 대장군에 취임했을 때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실 나라 시대부터 '장군(쇼군)'이라는 칭호가 붙는 관직은 많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정이 대장군이란 동쪽의 에미시(蝦夷) 3를 정벌하기 위한 직책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정이 대장군(征夷大将軍)에 오르고 모리 데루모토는 진서 대장군(鎮西大将軍)에 올라, 그 위에 전국을 통일하는 도요토미가를 꿈꾼 것입니다. 그렇기에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정이 대장군에 오르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지요.
더군다나,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황을 좌우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히데요시의 충신인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공이 15세가 될때까지 관백을 맡겨 주겠다.'라고까지 해, 당시 히데요리가 어려서 관백에 취임하지 못한다는 것은 도요토미 충성파에서도 상식이었습니다. 즉, 후대에서 남아있는 역사를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정이대장군의 취임이 모든 것을 바꾼 것처럼 느껴지나, 실은 이야에스의 정이 대장군 취임은 엄청나게 큰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이빈다.
게다가 오사카의 진의 계기인 교토 호코지 종명사건에서도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내건 조건이 '히데요리가 에도로 올 것, 요도도노가 에도에서 지낼 것, 히데요리는 개역해 오사카성을 나올 것 이라는 조건을 거는데, 이때야 말로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일개 다이묘로 만드려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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