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결백 증명
쿠루메성, 야나가와성 공방전
게이쵸5년(1600년) 10월 20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치쿠고 쿠루메성(留米城)을 공격해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宗茂)의 손자 오노 시게유키(小野鎮幸)와 싸웠습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초상화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사가 나베시마번의 선조가 되는 인물입니다. 원래 가마쿠라 시대에 다자이후(大宰府) 1의 쇼니(少弐) 2 직을 명령받은 일로 쇼니라 자칭한 쇼니 가문의 후예이고, 히젠 나베시마에 정착해, 그 지명을 성으로 삼은 나베시마 가문은 나오시게의 조부 나베시마 키요히사(鍋島清久)의 시대에,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를 궁지에서 구했습니다. 이후 류조지 가문의 가신이 되어, 두각을 나타내 갑니다. 나베시마가문을 중용 한 이에카네는 손녀 토우겐인(桃源院)을 키요히사의 아들 키요후사(清房)에 시집가게 합니다. 적손의 치카이에(周家)가 죽자, 그의 정실이었던 여성 케이린니(케이린니)가 키요히사에게 시집가기도 합니다.
이윽고, 이에카네의 손자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가 '히젠의 곰'이라고 하는 이명으로 불려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과 대등해져 '큐슈3강'의 한 명이 되는 무렵에, 이미 류조지와 나베시마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나오시게는 겐키 원년(1570년)에는, 조부를 방불과 시키는 훌륭한 작전으로 이마야마 전투를(이마야마전투) 승리로 이끌어, 또다시 류조지를 위기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년에 술에 빠져, 그 지략이 무디어진 류조지 다카노부가 다데나와테 전투(다테나와테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다카노부의 적남 마사이에(政家)는 병약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나오시게가 당주직을 수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오시게는 아들 카츠시게(勝茂)와 함께, 그 후도 류조지 가문을 지지합니다. 덴쇼 15년(1587년) 하시바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에서는 나오시게가, 분로쿠 원년(1592년)의 임진왜란에서는 아들 카츠시게가, 류조지의 가신단을 인솔해 참전했습니다. 이 근처에서 사실 류조지의 분가나 다름없은 나베시마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는 무장이 늘어납니다. 이에 나오시게가 고민하던 중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납니다.(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나베시마 카츠시게 초상화, 늙은 초상화뿐입니다. ㅠㅠ
이 세키가하라는 지방 곳곳에도 영향을 미쳐, 호쿠리쿠에서는 마에다 가문의 명운을 건 아사이나와테 전투가(아사이나와테 전투), 아이즈에서는 우에스기와 모가미의 하세도우 전투가(하세도우 전투), 큐슈에서도 오오토모의 재흥을 노리는 군세가 일어난 이시카키바루 전투(이시카키바루 전투)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베시마 가문은 동군, 서군 어디에 설 것인지 선택하게 됩니다.
결국 이들은 사나다 가문(이누부시의 이별)처럼, 아버지 나오시게는 동군에, 아들 카츠시게는 서군에 서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누가 이기던지 가문을 보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오시게는 직접 세키가하라에 가지는 않고 거리를 핑계로 이야에스에게 금을 진상하며 자신을 어필했습니다. 하지만 아들 카츠시게는 적극적으로 후시미성 공방전(후시미성 공방전)에 참가했습니다. 얼마 뒤, 전황이 동군에 유리하다 본 나오시게는 재빠르게 카츠시게를 동군으로 오게 합니다. 그뒤, 그는 큐슈의 전장에서 동군측의 입장을 과시하듯 전투를 벌입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 초상화
게이쵸5년(1600년) 10월 20일 다치바나 무네시게의 치쿠고 쿠루메성에의 공격을 개시합니다. 무네시게는 서군으로, 오츠성을 공격해(오츠성 공방전), 함락한 뒤 세키가하라로 향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세키가하라는 반나절만에 끝나, 그는 재빠르게 본거지인 야나가와성(柳川城)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쿠루메성을 함락시킨 다음 나오시게가 공격하는 것은 물론, 그 본거지인 야나가와성입니다. 이에 가토 기요마사와 쿠로다 죠수이까지 와, 무네시게는 절체절명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때 동료였던 가토 기요마사의 설득으로, 그는 항복하게 됩니다. 항복조건으로 더이상 도쿠가와군의 진군을 막은 무네시게는 료닌이 됩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상당히 인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이들이 그를 추천하는 추천장을 써 주어, 결국 2대 에도막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가 그를 복권시켜, 무츠 다나쿠라(棚倉) 1만석을 수여받고 참모가 됩니다. 불과 4년만에, 그의 영지는 3배가 늘어나니 그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알 듯 합니다. 겐나 6년(1620년) 무네시게의 개역 후에 영지를 다스리던 다나카 가문이 후계자가 없자, 무네시게는 자신의 영지를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대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의 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야나가와성 그림
여기서도 스스로 선두에 서, 동군인 일을 어필하는 나오시게, 이 덕분에 카츠시게가 당초서군에 가담한 죄는 추궁 당하지 않게 됩니다. 게다가, 류조지를 단념한 가신에게 추천되어 나베시마 가문은 류조지를 대신해 수확량 35만석의 사가 지방 다이묘가 됩니다. 이 사가 나베시마번은 메이지 유신까지 계속됩니다. 그의 시대의 흐름을 읽는 능력과 그에 적합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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