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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다테나와테 전투 히젠의 곰, 넘어지다 류조지 다카노부 전사

일본 전국시대;

다테나와테 전투

히젠의 곰, 넘어지다 류조지 다카노부 전사



 덴쇼 12년(1584년) 3월 24일, 히젠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류조지와 시마즈가 싸운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로,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가 전사 했습니다.


 주군에 해당하는 쇼니 스게모토(少弐資元)이 역도로 몰아 류조지의 대부분을 죽여버렸지만, 다카노부의 증조부는 살아 남았습니다.(쇼니가와 류조지가) 그는 류조지가를 부활시킬 것은 다카노부뿐이라며 그를 환속시켰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 케이긴고(慶誾尼)의 도움을 받으면서 재기를 도모합니다. 이윽고 본가의 당주 류조지 타네미쯔(龍造寺胤栄)가 죽은 일로 그 부인과 결혼해 본가의 당주가 된 타카노부는 주군이었던 쇼니가를 멸망 시켜버려, 이마야마 전투로 오오토모를 무찌릅니다. 치쿠시, 히고 북부의 평정을 완료한 다음은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와 함께 '큐슈 3강'이 되어, '히젠의 곰'이라는 이명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상황도'


 그러나 덴쇼 12년(1584년) 시마즈가 시마바라 반도에 침략하고, 그 직후에 부하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시마즈 측으로 배신한다고 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덴쇼 8년(1580년)에 은거하고 있던 다카노부였지만, 아직도 정치적. 군사적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일도 있어 이 배신의 소식을 듣고, 즉석에서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3월 19일에는, 25,000의 군세를 인솔해 시마바라 반도에 진출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군세는 5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시마즈측인 아리마의 군세는 5,000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시마즈가 데려 온 것은 3,000 정도로 아무리 많이 추측해도 1만에 못 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용맹하게 싸운 류조지 사천왕으로 불리는 중신들은 다카노부의 죽음을 알고 나서 결사적으로 돌격하다 죽었다는 일을 근거로 볼때,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대장이 전장에서 죽는다고 하는 전국시대의 전투에서는 드문 전투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오케하자마 전투'와 닮은 것이 아닌가? 라고 하기도 합니다.


 패배한 쪽의 군세가 아득하게 많은데다, 대장이 말에 타지 않고 가마에 타고 있었던 것도 같으며, 대장의 죽음이 가문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주 오케하자마와 판박이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도 지적됩니다. 오케하자마에서의 이마모토 요시모토는 철저한 전략을 수립한 뒤에 오다 노부나가를 맞어 싸운 반면, 다카노부에게는 명확한 전략이 없는 채로 전투에 도전했다고 합니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비로 인해 기습을 허용한 요시모토는 실제로는 꽤 대단한 영주였습니다. 한편의 다카노부는 그의 군대를 본 루이스 프로이스가, '유럽의 군대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라며 절찬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찬이 아닌 노부나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쓰고, 크리스찬 영주인 오오토모 소린, 아리마 하루노부와 적대하던 다카노부에게 극찬을 했다는 것은 군대가 정말로 대단햇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번 전투에서도 다수의 총과 소량의 활을 가지고, 장창과 검을 찬데다가 복수의 대포도 끌고 왔었기에 이를  본 시마즈군은 얼굴이 일제히 새파래졌다고하는 시마즈측의 묘사까지 프로이스는 남기고 있습니다. 이런 지나친 우세는 다카노부에게 방심을 안겨주었습니다. 시마즈는 어떻게든 승리해야 했기에 소수로 게릴라 전법을 체택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투 전날 아리마 하루노부의 구원 요청을 받고 현지에 도착한 시마즈 이에히사는 적의 수가 많음에 놀랐다고 합니다. 그는 적은 군사로 이기기 위해 습지대인 오키타와테의 한가운데에 진을 치고 주위에 목채를 구축합니다.



전투 진형도



 이윽고 덴쇼 12년(1584년) 3월 24일 다카노부는 이러한 목책들을 무시하고 오키타나와테를 돌진해 갔습니다. 대군에 겁먹었는지, 시마즈가의 군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에히사의 작전이여서, 시마즈 진의 코앞까지 온 다카노부의 군세에 목책 뒤에 숨어 있던 총포대가 일제히 총을 발사합니다. 습지대를 돌격하고 있던 류조지군은 단번에 혼란에 빠져 다카노부는 시마즈의 카와카미 타다카타(川上忠堅)라는 무장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실은, 이 날의 전투에서 다카노부가 가마를 타고 있던 것은 은거하고 나서 술에 빠지고 예능에 열중해 유흥에 전념한 생활로, 말을 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에 가신들이 신뢰를 잃어 배반한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류조지 사천왕이 끝까지 분전하는 것을 보았을 때 아직 신뢰관계가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지 않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