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3)
나카무라 이치우지의 분전, 키시와다성 공방전
덴쇼 12년(1584년) 3월 22일, 오다 노부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호응 한 사이가 네고로 잇키가 이즈미 사카이 오오사카에 진출을 사도했으나 키시와다(岸和田城)성 성주 나카무라 이치우지(中村一氏)에 격퇴되었습니다.
나카무라 이치우지(中村一氏)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 천하를 눈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혼노지의 변)에서 죽은 뒤에, 야마자키 전투(야마자키 전투)로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해 주군이 원수를 갚은 하시바 히데요시는 그 뒤에 열린 오다의 계승자를 결정하는 키요스 회의(키요스 회의)를 유리하게 진행시켜 후계자를 본인이 추천하는 노부나가의 손자 산포시로 결정하고 후견인이 됩니다. 물론 이에 오다의 가로 시바타 가쓰이에, 칸베 노부타카 그리고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시즈가타케 전투가 일어나(시즈가타케 전투), 결국 패배한 시바타 가쓰이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자살합니다.(시즈가타케 전투스를 끌어들여 히데요시에 대항하려 합니다. 이에야스는 예전에 노부나가가 한시기 거성으로 하고 있던 코마키산성에 진을 치고 결전의 장소 하구로로 향합니다. 전국시대 최고의 영웅 중 두명의 전투가 서서히 막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키요스성을 공격하려면 매우 중요한 장소로 히데요시 산하의 모리 나가요시(森長可)도 그 장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리 나가요시는 대패하고(하구로 전투), 이에 놀란 히데요시가 이곳으로 향해, 양군이 대치하게 됩니다.
히데요시가 늦은 것은 사이가중이나 네고로중이라고 하는 기슈의 잇키 세력때문이었습니다. 이들 개인으로는 토호 보다 좀더 나을 뿐이나 집단이 되면 전국 다이묘와도 충분히 싸울 수 있는 무장 세력이 됩니다. 오사카를 비우면 그들이 오사카를 점거할 가능성에 경계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전투을 오사카에서 지휘하며 끝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누야마성을 탈취한 4일 뒤에 일어난 하구로 전투로 심한 패배를 입어 버립니다. 게다가 이에야스는 사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모두 활용해, 하구로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해 세상에서는 '히데요시의 형세가 불리하다'라는 인상을 자아냈습니다. 이에 많은 세력이 이야에스에게로 움직이려 하자 히데요시는 직접 출진해 버립니다.
키시와다성(岸和田城)
히데요시는 덴쇼 12년(1584년)에 오사카성에서 출진했습니다. 그리고 남쪽의 최전선인 키시와다성에 나카무라 이치우지를 배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덴쇼 12년(1584년), 히데요시가 오사카를 출발했다는 통지를 들은 사이가, 네고로의 기슈 잇키는 2만 3,000에 달하는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한 쪽은 동쪽의 야마기와를 지나 사카이로 향하고, 다른 한편은 키시와다에 공격을 시작 했습니다. 이 군세를 보고 이치우지는 직접 공격을 주장하나, 나이가 있는 장수들은 신중론을 펼칩니다. 하지만 이치우지는 말을 듣지 않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뒤, 말을 타고 출진해 버립니다.
이치우지보다 먼저 나와 분전 하던 젊은 무사들이 문득 되돌아 보자, 거기에는 삿갓이 그려진 우마지루시(전장에서 대장이 있는 장소를 나타내는 깃발)을 보고 사기가 충천해 적을 공격합니다. 아무리 수가 많아도 잇키는 오합지졸의 병사들이 모인 것이나 다름 없었기에, 패주하고 맙니다. 그 후, 이치우지는 300명 정도를 이끌고, 패주 해오는 적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사카이 방면에서 연기가 오릅니다. 여기서 군사들은 동요해 사카이 점령당했다면 또 다른 대군이 올것이니 성으로 피해 농성하자 하나, 이치우지는 '우리가 여기서 퇴각하면 성에 있던 병사들의 사기가 내려갈 것이다.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기껏해야 오합지졸일 뿐이다. 나에게 맡겨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근처에 말이 있으면 퇴각하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며 말을 모두 성으로 돌려 버립니다.
이윽고 나타난 군세를 향해, 활의 명수로서 알려진 신도 칸자에몬(新藤勘左衛門)을 필두로, 비와 같이 화살을 쏩니다. 이에 당황해 화살을 피하려하는 적군에 이치우지가 앞서 돌격합니다. 게다가 거기에, 잇키의 배후에 700인 군세가 등장합니다. 키시와다성이 공격을 받고 있는 일을 알아, 당시 키시와다성에 있던 14세의 아들의 일을 걱정해 달려 온 쿠로다 죠수이(黒田如水)의 군세였습니다 이로 인해 한층 더 사기가 높아지는 이치우지군은 큰 소리로 함성을 내며 단번에 돌입해, 금새 800 이상의 목을 베고 잇키를 격퇴합니다. 죠수이가 걱정한 아들,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는 말안장의 사방손에 복수의 목을 매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이가, 네고로 잇키의 키시와다성 공격은 보기 좋게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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