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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가신에게 살해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후지와라노 야스히라가 가신에게 살해되다



분지 5년(1189년) 9월 3일,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가 살해되어 영화를 자랑한 오슈 후지와라가 멸망 했습니다. 


 겐페이 쟁란에서 중립을 고수했던 오슈 후지와라 가문의 영지는 원래 미나모토 가문의 땅이었기에, 요리토모는 이것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이에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요시츠네를 받아들여 요리토모를 견제하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 버립니다. 그리고 뒤를 이은 후지와로노 야스히라는 그 평판이 갈리기는 합니다만, 오슈 후지와라 가문은 결국 요시츠네를 죽이고 그 목을 요시토모에게 보냅니다. 하지만 이도 허무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토모는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받아(야스히라 추토의 선지) 오슈 정벌을 시작합니다.(오슈 정벌)



오슈 후지와라 가문의 삼대



 분지 5년(1189년) 8월 8일~10일에 걸쳐서 전개된 아츠하지 전투에서 패배한 야스히라는 히라이즈미를 불태워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후지와라 삼대의 태평과 영화를 자랑했던 히라이즈미는 불타버립니다. 하지만 야스히라는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쿠리야가와노사쿠(厨川柵)로 도주해, 여기서 재흥하려 합니다. 오슈 17만기는 거의 대부분이 반농반사로 겨울이 되어 농한기가 오면 그 대군을 일으켜 적을 무찌를 수 있다는 계산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눈이 오면 추위에 익숙한 동국의 무장들이 더욱 유리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은상에 눈이 먼 그의 가신 카와다 지로우(河田次郎)의 배신으로 암살당해 버렸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입니다. 이 전투를 기록한 「이즈마카가미(吾妻鏡)」에 의하면 야스히라는 암군으로 등장합니다만, 실제로는 냉정하고 침착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