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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시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요시나리 전사, 우사야마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모리 요시나리 전사, 우사야마성 공방전 겐키 원년(1570년) 오미의 우사야마성에 쳐들어간 아자이, 아사쿠라군이 오다군과 격전을 벌여, 성주였던 모리 요시나리가 전사 했습니다. 텐분 22년(1553년)에 노부나가의 모리야꾸(傅役;전국시대 무장의 스승)인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가 죽은 뒤에(히라테 마사히데의 할복) 생긴 구멍을 매운것이 바로 모리 요시나리(森可成)입니다. 전국시대를 잘 아시는 분이라면 그 모리 란마루(森蘭丸)의 아버지라고 하는 편이 알기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코우지 3년(1557년)에는, 오다와 적대하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에게 '가신 토바 나오마사(戸部政直)가 오다에 배신을 획책하고 있다'하는 내용의 가짜의 편지를 보내려, 스스로가 상인으로 변장해 이마가와의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혼노지의 변의 서막, 노부나가의 사카이 마을 공격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혼노지의 변의 서막, 노부나가의 사카이 마을 공격 에이로쿠 12년(1569년) 오다 노부나가가 군자금을 요구해, 저항한 미요시 삼인중을 쫓아버리고 사카이(堺)의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상경을 완수한 오다 노부나가의 군세는 신사적인 태도로 꽤 평판이 좋고 상경 후 1개월에 교토를 거의 지배합니다. 교토에서 노부나가의 눈을 끈 것이 활기찬 사카이 마을이었습니다. 사카이는 당시 '네코쥬(会合衆)'라는 상인들의 대표자에 의한 자치로 운영되고 있는 독립국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총의 제조도 독점 했기 때문에 이렇게 경제발전을 계속하는 사카이 마을을 지배하면 방대한 세를 징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에이로쿠 11년(1568년) 사카이에 군자금 2만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혼간지와 노부나가의 반목, 제 1차 이시야마전투의 발발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혼간지와 노부나가의 반목, 제 1차 이시야마전투의 발발 겐키 원년(1570년) 이시야마 혼간지가 노다, 후쿠시마의 성채에 공격을 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 군사를 일으켰으니,이것이 바로 제 1차 이시야마 전투입니다. 노부나가는 '제육천마왕'등 종교를 탄압했다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런데 사실 노부나가 전의 종교세력은 민중의 마음을 잡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정치에 강하게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중들은 무장해서 승병이 되어, 정신적으로만 힘을 가진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노부나가가 한 것은 종교를 정치에 개입시키지 않는 정교 분리였지 종교 탄압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쫓겨난 혼간지는 갈수록 무장들과 료닌(방황무사)들을 받아들여 이 즈음에는 중앙 권력과도 깊은 연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나오시게, 5배의 오오토모를 유린하다 이마야마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나오시게, 5배의 오오토모를 유린하다 이마야마 전투 겐키 원년(1570년)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의 명령으로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의 사가성(佐嘉城)을 포위한 오오토모 치카사다(大友親貞)의 군에, 류조지의 부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기습해 오오토모군을 격파한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가 있었습니다. 보통 전국시대하면 일본 혼슈의 이야기를 떠올리기 쉽지만, 시고쿠와 큐슈에서도 혼란은 번져있었습니다. 큐슈지방의 전국시대역사는 '큐슈 삼국지'라고도 합니다.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와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 그리고 히젠의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가 각각 한 축을 담당하며 큐슈의 세력균형을 아슬아슬하게 맞추고 있었습니다. 원래 큐슈 북부를 짊어지던 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아네가와 전투(4) 나오츠네, 노부나가의 목을 취하려 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아네가와 전투(4) 나오츠네, 노부나가의 목을 취하려 하다 아자이 나가마사의 부인이 노부나가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은 말씀드렸었습니다. 잠시 나가마사와 노부나가가 만날때로 시간을 돌려보면, 이 때 노부나가의 접대를 맡은 것이 나가마사의 가신 엔도 키에몬 나오츠네(遠藤喜右衛門直経)였습니다. 키에몬은 나가마사가 어릴 적부터 모리야꾸(傅役; 전국시대 장수의 선생역)로서 가장 신뢰받는 측극이었지요. 그는 실력을 십분 발휘했고, 접대를 받은 노부나가도 매우 기뻐해 11세 연하의 나가마사와 진짜 형제와 같이 이야기를 주고 받아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윽고 날이 저문뒤, 나가마사는 거성의 오타다성(小谷城)으로 돌아와, 가신의 들은 숙소에 들어가고 노부나가의 곁에는 오직 시동이 14명 정도만 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아네가와의 전투(3) 아네가와의 칠본창과 하타사시모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아네가와의 전투(3) 아네가와의 칠본창과 하타사시모노 겐키 원년(1570년) 6월 28일은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과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이 부딪친 '아네가와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전투의 이야기는 저번에 했으니, 이번 포스팅에서는 전쟁의 비화들을 해 볼까 합니다. '아네가와의 칠본창(姉川の七本槍)'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칠본창이라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으로 불리는 무장들이 유명합니다만, 아네가와의 전투에서도 '아네가와의 칠본창'이라고 칭해지는 무장들이 있습니다. 연대도 이때가 앞서고, 수도 사실은 시즈가타케 쪽은 9명으로, 사실은 이 '아네가와의 칠본창'이 원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아네가와 전투에서 오다군이 고전해, 몇 안 되는 수로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아네가와 전투(2) 노부나가, 도쿠가와 연합군이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무찌르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아네가와 전투(2) 노부나가, 도쿠가와 연합군이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무찌르다 겐키 원년(1570년)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이, 오미의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과 싸운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아네가와 전투입니다. 오다니성(小谷城)은 험한 산 위에 있어 포위가 힘든데다 아사쿠라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은 아사쿠라의 중신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景鏡)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성을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노부나가는 어떻게든 오다니 성내의 군사를 꾀어내 평지에서 전투를 벌이려 합니다. 우선은 노부나가는 오다니성의 남쪽에 있는 요코타성(横田城)을 포위합니다. 오다니성은 험준한 산위에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물자의 운반이 쉽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에, 교통의 요소에 있는 요코타성을 잃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아네가와 전투(1) 노부나가, 이야에쓰와 나가마사가 대치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아네가와 전투(1) 노부나가, 이야에쓰와 나가마사가 대치하다 겐키 원년(157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가세를 요구한 오다 노부나가가 아자이 나가마사 토벌을 위해 기후를 출진했습니다. 어떻게든 무사히 기후로 돌아온 노부나가지만(가네가사키 퇴각), 그가 성격상 당하고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습니다. 물론 나가마사도 노부나가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는 노부나가의 오미 진공을 경계하기 위해, 기후와의 국경에 있는 타케쿠라베(長比)와 카리야쓰오(刈安尾)등의 장소에 성채를 구축하고 전투의 준비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행동은 생각보다 재빨랐습니다. 불과 1달이 지나기전 들어가자마자, 나가하라성(永原城)을 맡긴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 쵸우코지성(長光寺城)을 맡긴 시바타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바타 가쓰이에의 배수의 진, 야스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바타 가쓰이에의 배수의 진, 야스가와 전투 겐키 원년(1570년) 오다 노부나가가 쵸우코지성(長光寺城)을 맡긴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가 롯카쿠 부자를 물리친 야스가와 전투(野洲川の戦い)가 있었습니다.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위기에 빠진 노부나가는 겨우 교토로 돌아왔습니다.(가네가사키 퇴각) 그리고 교토를 나와 본거지 기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도중 비와호(琵琶湖)의 동남에 위치하는 쵸우코우지성의 성주로 시바타 가쓰이에를 임명해, 여기를 지키게 했습니다. 노부나가의 철퇴를 호기라 파악한 것은 다름아닌 롯카쿠 죠우테이(六角承禎), 타카하루(義治) 부자 였습니다. 롯카쿠가는 노부나가 상경때에 대패해(칸노우죠성 전투) 이후, 코우가나 이세등에서 단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반 노부나가 동맹의 서막, 가네가사키 퇴각 일본 전국시대;반 노부나가 동맹의 서막, 가네가사키 퇴각 겐키 원년(1570년)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가네가사키성을 공략한 오다 노부나가군에, 아자이 나가마사가 배반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전군이 철퇴를 개시한 가네가사키 퇴각(金ヶ崎の退き口)가 있었습니다. 당시 노부나가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토로 상경할 때 남 오미의 롯카쿠를 추방하고(칸노우죠성 전투) 북 오미의 아자이가에는 귀여운 동생을 시집보낸 동맹 관계였지요. 미노는 3년전에 손에 넣었고(이나바야마 공방전),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아들 노부야쓰에 딸 도쿠히메(도쿠히메)를 시집가게 해 아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경을 접하는 유일한 나라는 에츠젠의 아사쿠라가 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와카사의 국민 무토 토모마스(武藤友益)가 종종 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