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고쿠시대 썸네일형 리스트형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제 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시오자키 대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제 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시오자키 대진 에이로쿠7년(1564년) 가이의 다케다 신겐과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의 사이에 제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시오자키 대진(塩崎の対陣)이 발발했습니다.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하치만바라 전투) 이전에 관동관령이 된 겐신은 호조가와도 적대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에이로쿠7년(1564년) 신겐은 무츠 남부의 모리우지(芦名盛)에게 겐신의 배후를 찌르기를 요청하고 그 사이에 시나노와 에치고의 국경 부근에 있는 우에스기측의 성채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겐신은 관동의 호조와의 전투를 중단하고 에치고로 돌아갑니다. 번번이 자신의 천도를 막는 신겐에 분노한 겐신은 '다케다 하루노부 악행지사' 라는 원문(願文)을 각지의 절에 봉납하고, 신겐 토벌의 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우사미 사다미츠가 나가오 마사카게를 껴안고 노지리에 뛰어들다 일본 전국시대; 우사미 사다미츠가 나가오 마사카게를 껴안고 노지리에 뛰어들다 에이로쿠7년(1564년) 우에스기 사천왕의 한 명으로서 우에스기 겐신을 시중든 우사미 사다미츠(宇佐美定満)가 나가오 마사카게(長尾政景)와 함께 노지리못(野尻池)에서 익사했습니다. 원래 이즈국 우사미에서 나온 우사미 일족, 우사미 스루가노카미 사다미츠(宇佐美駿河守定満)는 에치고의 수호인 우에스기가의 부하로서 비와지마성(琵琶島城)의 성주를 맡고 있던 우사미 후사다타(宇佐美房忠)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사다미츠의 30세 전후 수호의 우에스기가에 대해 수호대인 나가오 다메카게가 수호의 우에스기 후사요시의 양자인 우에스기 사다자네를 수중에 넣어 반란을 일으키고, 사다자네를 주로 삼습니다. 후에 사다자네는 다시 힘을 되찾기 위해 다메카게와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사히데와 미요시가의 몰락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히사히데와 미요시가의 몰락 미요시 형제에게는 한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상자안에 들어 있는 풀벌레의 소리를 들은 후유야쓰가 형인 나가요시에게 '풀벌레조차 이렇게 소중히 기르면 장수하는데, 형은 사람의 목숨을 너무 허술하게 해.'라고 하자, 상냥한 동생을 귀여워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가요시도 결코 잔악한 이는 아니었습니다. 전국시대였기에 적의를 나타내는 이에게는 가차없었지만, 그는 그를 암살하려고까지 했던 쇼군이 화해를 요청하자 바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도에 돌아간 쇼군 요시테루는 불과 1년후에 스미모토와 결탁해 나가요시를 배제하려 합니다. 나가요시는 요시테루를 도운 아쿠타가와 쥬우로우(芥川孫十郎)를 항복시켜 빼앗은 아쿠타가와성(芥川城)을 거성으로 하고 가신 마츠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국의 첫 패자, 미요시 나가요시의 등장과 몰락 일본 전국시대; 전국의 첫 패자, 미요시 나가요시의 등장과 몰락 에이로쿠7년(1564년) 5월 9일, 미요시 나가요시가 남동생의 아타키 후유야쓰(安宅冬康)를 이이모리성(飯盛城)에서 죽였습니다. 군웅할거 하던 전국시대에 최초로 천하를 잡은 사람은 보통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을 떠올릴테지만, 실은 오늘의 주역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가 첫 번째로 천하를 호령했었습니다. 원래는 가아의 오가사와라(小笠原)가의 후예로 전국시대에는 아와(阿波)의 호족이었던 미요시가는 나가요시의 증조부 오키나가(之長)의 시대에, 호소카와 스미모토(細川澄元)의 옹립에 성공해 셋츠(摂津)의 수호대가 되어 교토와 오사카에서 활약했습니다. 오닌의 난, 동군의 장이었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친자식이 없어 스미모토, 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쵸쇼카베 모토치카, 모토야마가를 멸망시키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쵸쇼카베 모토치카, 모토야마가를 멸망시키다 에이로쿠 7년(1564년) 쵸쇼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가 모토야마성(本山城)의 모토야마 치카시게(本山親茂)를 공격해서 우리우노(瓜生野)로 쫓아 냈습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토사(土佐)를 둘러싼 나가하마오모테(長浜表) 전투로 첫 출진을 장식한 쵸쇼카베 모토치카. 그는 잘생겼지만 살이 희고 언행이 부드러운데다 사람을 만나도 거의 말하지 않고, 하루종일 방에서 시간을 보내 가신에게서는 '젊은 공주님(姫若子)'이라는 별명이 붙고, 아버지 마저 후계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첫 출진으로 훌륭한 활약을 합니다. '공주님'이라는 별명은 이 이후로 '토사의 걸물'로 바뀌고, 아버지도 모토치카를 인정하고, 모토야마를 무찌르라는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명참모 다케나카 한베에의 이나바야마성 점거 일본 전국시대;명참모 다케나카 한베에의 이나바야마성 점거 에이로쿠7년(1564년) 다케나카 한베에 시게하루 (竹中半兵衛重治)가 주군 사이토 타츠오키(斉藤龍興)의 이나바야마성을 빼앗았습니다. 다케나카 한베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일한 천재 참모로 일본의 참모를 꼽자면 반드시 첫 번째나 두 번째에 그 이름을 올릴 정도의 인물입니다. 그런 그의 아버지 다케나카 시게모토(竹中重元)는 사이토 도산 때부터 사이토가를 섬기는 미노 이와테성(岩手城)의 성주였습니다. 다케나가 시게하루는 소년무렵 무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학구파로 점잖고 과묵했으며 조용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종일 집안에서 책을 읽는 것에 전념해 상대가 무엇을 말해도 별로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세세한 일에도 구애되지 않고 분노를 겉으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호조와 사가미의 대진, 제 2차 코우노다이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호조와 사가미의 대진, 제 2차 코우노다이 전투 에이로쿠7년(1564년) 호조 우지야스군이 에도강을 넘어 다이간(対岸)에 포진 하는 사토미 요시히로(里見義弘)군에 기습공격을 개시한 '제2차 코우노다이 전투'가 있었습니다. 호조가는 텐분 15년(1546년)의 카와코에야전(카와코에 전투)에서 승리해 쿠보나 관동 관령이라고 하는 구세력을 이름만 남은 상태로 한 뒤 관동 북부에 세력을 늘려서 갑니다. 사토미가도 호조와 일촉즉발인 상태에서 관동에 세력을 늘릴 찬스를 계속 노리고 있었습니다. 제1차 코우노다이 전투(1차 코우노다이 전투)로부터 약 30년이 흘러 호조와 사토미 각각의 당주가 후대로 이어져 다시, 이 땅에서 자웅을 결정할 시기가 옵니다. 이번 전투에는 호조와 사토미 만이 아니고 여..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도쿠카와 이야에스의 미카와 잇코우잇키 진압 일본 전국시대; 도쿠카와 이야에스의 미카와 잇코우잇키 진압 에이로쿠 6년(1563년) 미카와 잇코우 잇키에 참가하고 있던 나츠메 요시노부(夏目吉信)가 이에야스 측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잇코우 잇키를 평정하려 나섭니다. 미카와 잇코우 잇키라고 하는 것은, 당시 , 조동종(曹洞宗)의 세력이 강했던 미카와 동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혼쇼지(本證寺)의 소라세이(空誓)를 중심으로 영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저항한 약 반년간의 잇코우잇키입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에노미야지(上宮寺)의 경내에 토쿠가와의 분사를 마음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과(이 설이 정설입니다) 혼쇼지에 도망친 건달을 도쿠가와의 가신이 허락을 받지 않고 포획 했기 때문에이라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아무튼 도쿠가와측..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모토나리, 아마고가의 방어선을 뚫다; 하쿠로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모토나리, 아마고가의 방어선을 뚫다; 하쿠로쿠성 공방전 에이로쿠6년(1563년) 모리 모토나리가,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아마고가의 이즈모(出雲) 하쿠로쿠성(白鹿城)에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와미 은광을 탈취한 모토나리는(이와미 은광 쟁탈전) 드디어, 아마고가의 이츠모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엔로쿠5년(1562년) 차남 깃카와 모토하루,삼남 고바야카 다카카게와 함께 총원 1만 5,000의 군사를 인솔한 모토나리는 이와미를 경유해 이즈모로 들어옵니다. 이 행동만으로 많은 이즈모의 쿠니진들이 시원스럽레 아마고를 단념해 모리의 산하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아라와이(洗合)에 도착한 모토나리는 츠케시로을 구축합니다. 동시에 아마고의 본거지 갓산토다성을 견제하기 위해, 거기에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 노부나가, 실패한 첫 상경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다 노부나가, 실패한 첫 상경 에이로쿠2년(1562년) 노부나가가 처음으로 상경합니다. 노부나가의 상경이라고 하면 에이로쿠 11년(1568)년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은 상경이 유명합니다만, 그 전 오와리 통일을 완수한 이후 상경을 감행했었습니다. 당연히 목적은 당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 하고 자신이 오와리를 지배하는무장임을 알리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상경은 전국의 눈이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전국의 장수들과 덴노에게도 자신을 알리려 했습니다. 노부나가는 500명이라는 적은 군사를 이끌고 상경을 결의 했습니다. 파격적인 것으로 유명했던 노부나가 답게 터무니없게 눈에 띄는 분위기의 차림새로 상경 했다고 합니다. 수도의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기묘한 생김새였다고 .. 더보기 이전 1 ··· 14 15 16 17 18 19 20 ··· 5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