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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시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쓰쿠시마 전투(5) 모리군의 추격과 다카카게의 분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쓰쿠시마 전투(5) 모리군의 추격과 다카카게의 분전 코우지 원년(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로, 스에 하루카타의 맹장 히로나카 타카카게가 전사 했습니다. 주군이 할복하고 군세가 이지러지는 상황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것이, 하루카타의 용장 히로나카 타카카게였습니다. 타카카게가는 키요카즈 겐지의 유파를 이어받는 명가였고, 단노우라 전투로 헤이케가 멸망한 뒤에 대대로 이와쿠니의 영주를 맡아 오오우치가의 가신들 중에서도 중심적 존재의 가계였습니다. 오오우치가의 제30대 당주 오오우치 요시오키와 그 아들 요시타카의 2대를 시중들고 있던 타카카게는 오오우치가의 신하가 된 모리가를 구하기 위한 안쇼우성 전투에서도 대활약했으며 오오우치가의 라이벌인 아마고가와의 일련의 항쟁에서는 모토나리와 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4) 이쓰쿠시마 급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4) 이쓰쿠시마 급습 코우지 원년(1555년) 모리 모토나리가 스오우의 오오우치가의 실권을 잡고있던 스에 하루카타를 넘어뜨린 이쓰쿠시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모토나리가 탄 배와 그의 군세는 충분히 서로간의 거리를 벌린채, 운명의 항해를 개시합니다. 선두의 배가, 호우포에 도착할 무렵에는 조금 바람도 잠잠해져 무사히 상륙을 끝냈을 때, 모토나리는 코다마 나리카타에게 모든 배를 가지고 돌아가도록 명합니다. 배수의 진을 치겠다는 것이지요. 모토나리를 빼낼 배라도 남겨 놓자고 진언이 나왔지만, 모토나리의 결의는 단단했습니다. 한편 2 부대는 쿠마가이 노부나오(熊谷信直), 노미 무네카츠(乃美宗勝)를 선두로 세워, 예정 대로 크게 우회 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3) 누구의 원군인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3) 누구의 원군인가? 코우지 원년(1555년) 이쓰쿠시마의 싸움을 구원하려는 모리군과 무라카미의 수군 2백척이 아키 하츠카이치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원군의 소식이 없는 것에 초조해진 모토나리는 삼남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를 통해 마지막 원군 재촉을 하나, 다음날이 되어도 그들이 나타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하루카타에게 붙을 가능성마저 있었습니다. 이대로 미야오성이 점령당하면 꾀어낸 작전도 휴지쪼가리가 되고 단지 이쓰쿠시마가 제압되어 해안가의 성들이 모두 넘어가는 결과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게다가 육지에서는 군사에서 이길 수 있을 전망은 적기 때문에 모토나리는 답이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원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2) 미야오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2) 미야오 공방전 코우지 원년(1555년)스에 하루카타가 대군을 인솔해 이와쿠니로부터 이쓰쿠시마에 건너, 언덕에 본진을 두고 모리측의 미야오성을 공격했습니다. 2만의 군세를 인솔하고 거점을 출발한 하루타다는 이와쿠니의 에이코우지(永興寺)에 여러 장군을 모으고 이번 모리 공격에 대해 군의를 엽니다. 용장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隆兼) 등 몇명의 무장은 육로를 선택할 것을 진언합니다. '아마 이번 미야오성은 육상의 야전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원취의 고육지책이니 이쓰쿠시마를 고집하는 것은 그만둬야합니다.' 즉, 모토나리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타다는 '세토내해의 해상권을 잡으면, 해안 가의 모든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쵸쇼카베 모토치카, 토사를 통일하다 시만토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쵸쇼카베 모토치카, 토사를 통일하다 시만토가와 전투 덴쇼 3년(1575년), '토사의 걸물'이라는 이명을 가지는 쵸쇼카베 모토치카가, 칸노우라성을 공략해, 토사 통일을 완수했습니다. 토사 서부에 있는 하타군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문신 이치죠가 소유의 장원이었습니다. 오닌 원년(1467년)에 발발한 오닌의 난에 교토가 불태워져 시가전에 진저리가 난 이치죠 노리후사(一条教房)는 교토를 탈출해, 이곳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윽고 이치죠가는 하타군의 나카무라성(中村城)을 거성으로 삼는 전국 다이묘가 됩니다. 원래 덕망이 자자했던 이치죠가는 이곳에서도「문신 영주」라고 불리며 계속 존경 받고 있었습니다. 5대째의 이치죠 카네사다(一条兼定)의 무렵, 이 이치죠가도 전국의 물결에 삼켜지게 됩니다. 이 즈음에..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내, 죠우케이인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아내, 죠우케이인 죠우케이인 (定恵院)은 전국 시대 가이국의 전국 다이묘 다케다 노부토라의 장녀이자 이마가와 요시모토 의 정실입니다. 즉, 다케다 신겐의 누이입니다. 텐몬 6 년 (1537 년) 18 세의 나이로 그녀는 역시 18세 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에 시집 갑니다. 요시모토는 전년 하나구라(花倉)의 난 을 거쳐 가독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영지의 인정을 위해 원래 적이었던 다케다와 동맹을 맺으려 죠우케이인과 결혼합니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다케다와 적대하던 호조의 분노를 사, 공격해 오지요. 노부토라가 돕지만, 영지의 일부는 빼앗기고 맙니다. 하지만 그는 이 사건을 받침돌로. '동해도제일궁'으로 성장해 갑니다. 텐몬 7 년 ( 1538 년 ),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거구였을까? 쇼안겐큐니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거구였을까? 쇼안겐큐니 아자이 히사마사 의 장녀입니다. 생모는 히사마사의 시녀라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형제자매로 아자이 나가마사와 교도쿠 마리아(京極マリア)가 있습니다. 그녀는 장녀였지만 서출이기에 할아버지의 양녀로 들어갑니다. 어머니와 함께 짓사이인(実宰院)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그곳을 관장하게 됩니다. 짓사이인 본당에는 에도시대에 제작된 쇼안켄큐니의 목상이 있다고 합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키가 5 척 8 촌 (176cm)에 체중이 28 관 (105kg)인 그야말로 거구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남자들도 170이면 위너였던 시절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지증왕이 키가 크고 대물(...)이라 결혼을 못할 뻔 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결혼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치쿠미가와에 투신한 오후네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치쿠미가와에 투신한 오후네 오후네(於フ子)는 전국 시대 의 무장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의 측실로 시나노 국 나카노성(中野城)성주 다카나시 스미요리(高梨澄頼)의 딸입니다. 북 시나노에서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함께 세력을 자랑 한 다카나시 마사요리(高梨政頼)의 자매입니다. 시집 간 정확한시기는 알 수 없지만, 텐몬 19 년 (1550 년) 다카 나시 마사요리와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보통 이 전후라고 생각합니다. 텐몬 22 년 (1553 년) 무라카미 본성인 가쓰라오성(葛尾城)이 다케다 신겐 에 의해 함락당하자 그녀는 성에서 탈출 해 북쪽으로 달힙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치쿠미가와가 있어 더 이상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재치를 발휘한 뱃사공 덕에 강을 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전국시대의 골드미스, 이이 나오토라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전국시대의 골드미스, 이이 나오토라 이이 나오토라(井伊直虎)는 전국시대의 몇 안되는 여성 영주 중 하나입니다. 도토미 이이협곡의 쿠니진인 이이가의 당주를 맡아 '여성 지도우(女地頭)'로 불렸습니다. 이이 나오치카(井伊直親)와 약혼했으나 결혼하지는 못하고 생애 내내 미혼이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사천왕인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의모입니다. '지도우'란 전국의 장원에 두었던 관직으로, 장원을 관리하고, 조세의 징수, 치안 유지 등을 맡았던 벼슬을 말합니다. 전국시대에는 드물게 여성인 나오토라가 어떻게 결혼도 안하고 이 직책을 맡을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아버지 이이 나오모리(井伊直盛)에게는 아들이 없어 그녀를 지로호시(次郎法師)라는 남자아이 이름을 붙입니다. 그렇다고 여자가 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신겐의 측실, 오부라카와 부인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신겐의 측실, 오부라카와 부인 오부리카와부인 (油川夫人)은 쿄우라쿠(享禄) 원년(1528년)또는 텐몬 5년(1536년)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가이국지」에 따르면 오부라가와 노부모리(油川源左衛門信守)라고 합니다. 그녀는 신겐의 측실로 많은 자녀를 남겼습니다. 니시나 모리노부(仁科盛信), 카츠라야마 노부사다 (葛山信貞), 마쓰히메(松姫) 그리고 키쿠히메 (키쿠히메)를 낳았으며, 마리히메(마리히메)도 오부리카와 부인의 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의 라이벌인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은 스스로를 비사문천의 화신이라 생각해서 였는지 평생 여자를 범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술은 왕창 먹어, 일설에는 술로 인한 뇌질환으로 죽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