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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시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오다와라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테 마사무네, 오다와라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다 덴쇼 18년(1590년) 6월 5일, 다테 마사무네가 오다와라성을 포위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군에 참가해 진을 쳤습니다. 덴쇼 18년(1590년), 천하를 눈 앞으로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지막 장애물 호조를 공격하기에 즈음해, 아직 산하에 들어가지 않은 토호쿠의 무장들에게 참전을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향후 히데요시의 산하에 들어갈지 말지를 묻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히데요시가 호조의 본거지인 오다와라성을 포위했습니다.(오다와라성 포위) 전년, 히데요시와 친분이 있던 아시나 가문을 스이아게하라(摺上原) 전투에서 멸해, 토호쿠의 대부분을 손에 넣은 외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에게서 재삼에 걸쳐 호출을 받고 있었습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와라성 공방전(1) 공성의 대가 히데요시와 최강의 오다와라성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다와라성 공방전(1)공성의 대가 히데요시와 최강의 오다와라성 덴쇼 18년(1590년) 4월 3일, 오다와라에 도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성 포위의 태세를 정돈했습니다.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시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덴쇼 13년(1585년)에는 시코쿠를 평정 해(모토치카 항복), 덴쇼 14년부터 15년에 걸쳐 큐슈를 평정 해(요시히사 항복), 그 사이에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도 주종 관계를 묶어(우에스기 카게카쓰 상경)는 이제 관동의 호조를 공격합니다. 아시가라성(小田原城), 야마나카성, 니라야마성(韮山城)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돌파한 히데요시는 우에스기, 마에다의 호쿠리쿠 군세에게는 관동 각지의 호조의 성을 공격하게 하고, 스스로는 본대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난공불락의 야마나카성 함락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난공불락의 야마나카성 함락 덴쇼 18년(1590년) 3월 29일, 하시바 히데츠구(羽柴秀次)군이 야마나카성(山中城)을, 오다 노부오(織田信雄)군이 니라야마성(韮山城)을 공격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이 개시되었습니다.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시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덴쇼 13년(1585년)에는 시코쿠를 평정 해(모토치카 항복), 덴쇼 14년부터 15년에 걸쳐 큐슈를 평정 해(요시히사 항복), 그 사이에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도 주종 관계를 묶어(우에스기 카게카쓰 상경), 덴쇼 14년의 11월 4일부로 '관동총무사령'을, 다음해의12월 3일부로 '오량국총무사령'을 반포합니다. 이 '총무사령'이란, '다이묘끼리 사적..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와라 정벌 개시, 히데요시의 군의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다와라 정벌 개시, 히데요시의 군의 덴쇼(연호) 17년(1589년) 12월 10일,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쥬라쿠(聚楽)에서, 호조의 오다와라성 공격의 군의를 열었습니다. 시코쿠, 큐슈를 평정 해 관백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관동과 토호쿠였습니다. 토호쿠에서는, 요네자와(米沢城)성의 다테 마사무네와 야마가타성(山形城)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의 두 세력이 있었지만, 관동은 호조 소운 이래 100년에 걸쳐 군림해 온 호조가 당당히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호조는 호조 우지나오가 다이묘직에 있긴 했었지만, 실권은 아직 아버지인 우지마사가 잡고 있었고, 히데요시에게는 약간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토호쿠의 다테와 미카와의 도쿠가와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 오다와라 정벌을 선포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히데요시, 오다와라 정벌을 선포하다 덴쇼 17년(1589년) 11월 2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에게 선전포고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시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덴쇼 13년(1585년)에는 시코쿠를 평정 해(모토치카 항복), 덴쇼 14년부터 15년에 걸쳐 큐슈를 평정 해(요시히사 항복), 그 사이에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도 주종 관계를 묶어(우에스기 카게카쓰 상경), 덴쇼 14년의 11월 4일부로 '관동총무사령'을, 다음해의12월 3일부로 '오량국총무사령'을 반포합니다. 이 '총무사령'이란, '다이묘끼리 사적인 분쟁을 해선 안 된다'고 하는 명령으로, '안쪽 양국(奥両)'은 무츠와 데와의 일입니다. 결국,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오슈의 패왕'이 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테 마사무네 '오슈의 패왕'이 되다 덴쇼 17년(1589년) 11월 4일, 센도칠군(仙道七郡)의 이시카와 아키미츠(石川昭光)가 다테 마사무네의 산하에 들어왔습니다. 덴쇼 17년(1589년) 6월 5일의 스이아게하라(摺上原) 전투로 승리를 거둔 외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 한편 아시나 측은 그 퇴로가 강에 막혀 많은 희생자를 내 버렸습니다. 총대장의 아시나 모리시게(芦名盛重)는 어떻게든 거성 쿠로카와성(黒川城)으로 돌아와 분명히 쳐들어 올 다테군에 대해, 농성할 지, 혹은 또 군세를 정비해 요격할 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물론, 승리한 마사무네도 아시나 가문을 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성으로 돌아온 모리시게의 군세를 추격 해야 했습니다. 마사무네는 일단 이나와시로성(猪苗代城)으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의 스카가와성 공략과 오나미히메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테 마사무네의 스카가와성 공략과 오나미히메 덴쇼 17년(1589년) 10월 26일, 다테 마사무네의 공격에 의해서 스카가와성(須賀川城)이 함락되어, 여기를 본거지로 했던 니카이도(二階堂) 가문이 멸망 했습니다. 니카이도 가문은 후지와라의 피를 이어받는 명문으로, 가마쿠라 시대 다이안 원년(1444년) 무렵에, 무쓰노쿠니(陸奥国) 이와세군(岩瀬郡)에 지도우(地頭)직을 제수받아, 스카가와 니카이도(須賀川二階堂) 가문의 초대가 되는 니카이도 타메우지(二階堂為氏)가 카마쿠라에서 이곳으로온 이래로 스카가와성을 거성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9대 째의 당주는 니카이도 모리요시(二階堂盛義)그리고 그의 아내가 오늘의 주역 다이죠우인 오나미히메(大乗院阿南姫)입니다. 그녀는 다테 가문의 15대 당주 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와라 정벌의 서막, 호조의 나구루미성 탈취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다와라 정벌의 서막, 호조의 나구루미성 탈취 덴쇼 17년(1589년) 10월 23일,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의 가신으로 누마타성(沼田城)을 맡는 이노마타 쿠니노리(猪俣邦憲)가 사나다의 나구루미성(名胡桃城)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가이의 다케다의 가신이었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는 덴모쿠산에서 다케다 가쓰요리가 할복(다케다가 멸망하다) 해 다케다가 멸망 한 후, 다케다의 옛 영토는 승자인 오다 노부나가의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해 오다의 가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부나가가 불과 3개월 후의 덴쇼 10년 6월에, 혼노지에서 쓰러져 버립니다.(혼노지의 변) 그로 인해 구 다케다령은 눈 깜짝할 사이에 미카와의 도쿠가와,사가미의 호조, 에치고의 우에스기 3강의 표적이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우에스기의 전국 굴지의 금광 사도섬 공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우에스기의 전국 굴지의 금광 사도섬 공략 덴쇼 17년(1589년) 6월 12일,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사도(佐渡)에 건너가, 가와하라다성(河原田城)을 공격해 성주 혼마 타카토(本間高統)이 할복 했습니다. 사도는 일본에서 최대급의 금의 산지입니다. 사도의 금산(佐渡金山)의 대명사인 아이카와 카나야마(相川金山)는, 게이쵸 6년(1601년)에 발견된 것으로, 오늘의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츄고쿠의 패자가 된 모리의 첫 번째 발걸음이 모리와 아마고의 은광 쟁탈전이었던 것처럼, 금광은 누구던지 손에 넣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도섬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사도 수호대인 혼마 가문이 통치하는 섬으로 우에스기 겐신의 시대에는, 카나보리(광부)들을 보내는 등 관계를 쌓아 올리고 있었습..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데루모토의 히로시마성 축성시작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모리 데루모토의 히로시마성 축성시작 덴쇼 17년(1589년) 4월 15일, 모리 데루모토가 히로시마성의 축성에 착수했습니다. 선대 모리 모토나리의 '화살 세 대의 가르침(三矢の教え)으로 유명한 아키의 전국 다이묘 모리 가문. 그 모토나리가 아마고 가문의 일개 고쿠진이었을 무렵으로부터, 산요, 산인에 일대 세력을 자랑하는 대영주가 되고, 그 손자 데루모토가 뒤를 이은 때까지, 모리의 본거지는 쭉 코오리야마성(郡山城)이었습니다. 코오리야마성은 산간에 만들어진 산성으로, 그 지형을 살려 난공불락이라고 구가해진 견고한 성입니다. 모토나리가 아마고 가문에서 독립하는 계기나 된 아키산성 공방전에서도 오오우치의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4개월간, 아마고의 총원 3만이라고 하는 대군을, 불과 8천으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