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의 스카가와성 공략과 오나미히메
덴쇼 17년(1589년) 10월 26일, 다테 마사무네의 공격에 의해서 스카가와성(須賀川城)이 함락되어, 여기를 본거지로 했던 니카이도(二階堂) 가문이 멸망 했습니다.
스카가와성(須賀川城) 모식도
니카이도 가문은 후지와라의 피를 이어받는 명문으로, 가마쿠라 시대 다이안 원년(1444년) 무렵에, 무쓰노쿠니(陸奥国) 이와세군(岩瀬郡)에 지도우(地頭)직을 제수받아, 스카가와 니카이도(須賀川二階堂) 가문의 초대가 되는 니카이도 타메우지(二階堂為氏)가 카마쿠라에서 이곳으로온 이래로 스카가와성을 거성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9대 째의 당주는 니카이도 모리요시(二階堂盛義)그리고 그의 아내가 오늘의 주역 다이죠우인 오나미히메(大乗院阿南姫)입니다. 그녀는 다테 가문의 15대 당주 다테 하루무네(伊達晴宗)의 딸로, 다테 마사무네의 아버지 다테 테루무네(伊達輝宗)의 여동생이므로, 결국은 마사무네의 숙모입니다.
다이죠우인 이라는 이름은 사후에 붙여진 계명으로, 오나미는 '이렇게 불렸을 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정도의 전승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실제 본명은 모릅니다. 아무튼 길기 때문에 오나미히메(오나미)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녀가 모리요시에게 시집간 것은 에이로쿠 연간(1558년~1570년)의 초 무렵이라고 합니다. 두 명은 사촌자매간이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의 니카이도씨는, 요네자와성(米沢城)을 본거지로 하는 다테와 쿠로카와성(黒川城)의 아시나(芦名) 가문과 히타치(常陸)의 사타케(佐竹) 가문의 사이에서 낀 상태였지만, 이 혼인으로 아내의 친가인 다테 가문의 지원을 얻을 수 있어 종종 위협하는 아시나에도 대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이한 일러스트로 컬트적인 인기를 지닌 니카이도 모리요시
하지만 다테 테루무네가 아시나와 강화해 버려, 대 아시나와의 교전에 있어서 지원을 얻을 수 없게 되어 버리자, 에이로쿠 9년(1566년)에는 아시나 모리우지(芦名盛氏), 모리오키(盛興) 부자에게 마츠야마 요코타료성(横田両城)을 공락당해 모리요시는 부득이 적남 모리타카(盛隆)을 쿠로카와성에 인질로서 보내고 화목을 맺어 이후, 니카이도는 아시나에 속하는 형태로 영토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 덴쇼 연간에 들어가자 아시나 가문에 혼란이 일어나, 여기에 니카이도 가문도 번농 됩니다. 이미 아버지에게서 당주직을 양보해져 아시나 가문의 당주가 되고 있던 아시나 모리오키가, 덴쇼 3년(1575년)에 29세의 젊음으로 죽어버리고, 그의 뒤를 이어야 할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쿠로카와성에서 인질이 되고 있던 모리요시의 적남 모리타카가 상속을 하게 됩니다. 그는 죽은 모리오키의 부인 히코히메(彦姫: 다테 하루무네의 딸로 테루무네의 양녀)를 그대로 부인으로 맞아 들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다시 모리우지가 후견인으로 실권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덴쇼 8년(1580년)에 그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또 다음해 이번에는 니카이도의 당주 모리요시가 38세의 젊음으로 죽어 버립니다.
실은 이 근처의 사료가 매우 적어, 정보에 혼란이 있습니다만, 모리요시에게는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분명히 그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이번 아시나를 이은 모리타카와 성장해 이와키 쯔네타카(岩城常隆), 다테 나리자네(伊達成実)에 시집가는 여자 아이의 2명만이 전해집니다. 유키치카(行親)라고 하는 차남이 있어 니카이도씨를 이었다고 하는 사료도 있습니다만, 당주로서의 구체적인 기록은 아무것도 없어 한편에서는, 이 유키치카는 젊은 나이로 죽어 버렸다고 하는 사료도 있습니다. 또, 3남으로, 쿄우에이(行栄)라고 하는 승려가 된 아이가 있었다고 하는 사료도 있습니다만, 이 사람도 빨리 죽었다고 여겨지는데다, 모리요시에는 모리타카 밖에 아이가 없었다고 하는 사료도 있습니다. 물론 아이가 있다고 해도 정실의 아이라고 할 수 없기에, 그냥 니카이도를 이을 만한 후계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모리요시 사후 니카이도 가문을 다스린 것은 다름아닌 오나미히메였습니다. 덴쇼 12년(1584년) 그녀의 아들 모리치카가 남자와 연애를 하다 가신에게 살해당한다고 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뒤의 당주직을 이은 것은 모리치카의 아들로, 불과 생후 1개월의 카메오마루(亀王丸)가 이어 그 어머니인 히코히메가 테루무네의 후견을 받아 아시나 가문을 통솔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역시 덴쇼 12년에 당주직을 양위받아 다테 가문의 당주가 된 다테 마사무네입니다.
스스로 아버지를 죽인 마사무네
이 당주 교대로 아버지 대의 동맹 관계가 엉망진창이 되어, 토호쿠 지역에 암운이 흐릅니다. 이 해의 8월에, 마사무네가 오오우치 사다쯔나(大内定綱)의 지성 오테노모리성(小手森城)을 공격하고 그 성안에 모든 사람을 학살한 일로 사다쯔나가 도망친 니혼마츠성(二本松城)의 하타케야마 요시쯔구(畠山義継)가 항복한 뒤 납치 사건을 일으켜 마사무네가 스스로, 아버지 테루무네를 살해(테루무네 납치사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고 하는 비참한 결과를 낳고 맙니다. 게다가 그것은, 다음해인 덴쇼 13년(1585년)의 히토토리바시 전투로 발전합니다. 그 다음 해인 덴쇼 14년(1586년)에는 아시나가를 이은 아이 카메오마루가 불과 3세로 죽어, 그 후계를 둘러싸고, 마사무네의 남동생 코지로우(小次郎)와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의 삼남 요시히로(義広)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고 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런 중에 마사무네는 스카가와를 공략하려 합니다. 이곳은 물론 니카이도의 스카가와성이 있습니다만, 아시나와 사타케 세력의 중간이 되고 있는 장소에서, 중요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오나미히메는 마사무네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이윽고, 덴쇼 17년(1589년) 6월 5일의 스리아게하라(摺上原) 전투로 아시나를 물리친 마사무네는 아이즈를 거의 제압해주변이 많은 무장이 다테에 종속을 맹세합니다. 하지만 오나미히메는 단호히 정종과 싸우는 일을 선택합니다. 니카이도 가신 중에도, 마사무네의 기세에 겁을 먹고 항복하자고 하는 이가 나왔지만, 오나미히메는 단호했습니다.
1. 테무무네가 적대하고 있는 타무라 키요아키(田村清顕)의 딸 아이히메(愛姫)와 혼인 한 일.
2. 자신의 딸이 시집간 이나와시로성에 조략을 걸친 일.
3. 아시나를 공격해 쿠로카와성을 빼앗은 일.
4. 아버지를 죽인 일.
5. 히타치오타(常陸太田)에 출진해, 숙모(오나미히메의 여동생)와 그 아들 사타케 요시노부를 멸하려 한 일
그녀의 연설로 성병들의 사기는 충전됐습니다
이상 5조를 '데루무네 오역(政宗五逆)'으로 가신과 백성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의 연설
을 한 오나미히메 그것은, 마치 호조 마사코(北条政子)의 눈물의 연설과도 같이 가신과 백성의 마음을 잡아, 성내는, 단번에 사기가 높아 집니다. 이렇게 해서 덴쇼 17년(158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다테군이 스카가와성에 맹공격을 개시합니다. 원래 수의 차이가 있는 데다가, 실은 중신의 여러명이 이미 마사무네와 내통 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미, 전투가 시작된 시점에서, 결과는 시간문제였습니다. 그날 오후 5시 스카가와성은 함락 되어, 여기에 니카이도씨는 멸망 합니다. 일설에는 기마 500기, 아시가루 2,000명이 죽은 대패였다고 합니다.
오나미히메는 할복을 시도합니다만, 야박하게도 다테의 병사에 발견되어 구조되어 버립니다. 마사무네에 있어서는 숙모에 해당하는 오나미히메이기에 마사무네는 그녀를 후대 하려고 합니다만, 오나미히메는 그것을 거절해, 여동생이 있는 사타케 가문의 신세를 지는 일을 희망해 그리로 가버립니다. 그리고 13년 지난 게이쵸7년(1602년) 사타케 가문은 데와(出羽) 아키타(秋田)로 영지가 바뀝니다. 이를 따라가던 오나미히메는 병으로 죽고 맙니다. 그녀는 끝까지 니카이도 가문의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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