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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 오다와라 정벌을 선포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 오다와라 정벌을 선포하다



 덴쇼 17년(1589년) 11월 2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에게 선전포고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시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덴쇼 13년(1585년)에는 시코쿠를 평정 해(모토치카 항복), 덴쇼 14년부터 15년에 걸쳐 큐슈를 평정 해(요시히사 항복), 그 사이에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도 주종 관계를 묶어(우에스기 카게카쓰 상경), 덴쇼 14년의 11월 4일부로 '관동총무사령'을, 다음해의12월 3일부로 '오량국총무사령'을 반포합니다. 이 '총무사령'이란, '다이묘끼리 사적인 분쟁을 해선 안 된다'고 하는 명령으로, '안쪽 양국(奥両)'은 무츠와 데와의 일입니다. 결국, '관동에서 토호쿠까지 일대에 있는 무장들은 전국시대처럼 마음대로 전투하지 말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인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관백의 권한으로 반포한 천하 통일의 증거라고도 말할 수 있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와서도 아직 히데요시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  호조 소운 이래, 100년에 걸쳐 관동을 좌지우지해 온 호조입니다.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



 이때 호조를 이끄는 것은 호조 우지나오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 부친인 우지마사(氏政)의 의향이 크게 반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북쪽은 다테 마사무네와 연결하고, 남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을 우지나오의 신부로 하는 삼국동맹으로 히데요시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산하가 되어(히데요시와 이야에스의 회담), 오히려 적이 되었습니다. 도쿠가와는 호조에게 '상경해 히데요시를 알현할 생각이 없는가? 없다면 딸을 돌려주어도 좋다.'라고 나왔지요.


 이에 호조도 긴장해 덴쇼 16년(1588년)에는 우지마사의 동생 우지노리(氏矩)를 상경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덴쇼  17년(1589년) 10월 23일 호조의 이노마타 쿠니노리는 돌연 사나다의 나구루미성을 탈취합니다.(나구루미성 탈취) 히데요시의 '총무사령'을 멋지게 위반한 것입니다. 이 성의 위치 자체가 호조의 누마타성과는 강 하나 사이를 둔 것으로 일부러 '점령해 주세요'하는 듯한 감이 있어 히데요시의 책략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히데요시는 사죄의 의미로 우지마사, 우지나오 부자의 상경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호조는 이를 무시합니다.


 결국 덴쇼 17년(1589년) 11월 24일, 히데요시는 호조 정벌의 선전포고장을 호조 우지나오에게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히데요시의 선전포고문



 하나,  호조의 일은 근년 조정을 업신여겨 상경을 하지 않고, 고의로 관동에 대해 자신의 의지대로 난폭하게 행동했다. 이는 사리에 맞지 않다. 

 그 사이에, 지나간 해의 죄를 더해 물으려 할 때 스루가 오오난도(大納) 이야에스경(卿) 일가를 이끌고 재차 문안을 왔기에 호수(条数)로써 본부를 다했다. 그가 보증해 사면을 하려 했으니, 곧 미노를 물러난 것으로 사례를 말씀드리는 바이다.


  처음에는 동생 우지노리의 상경에 감사를 말하는 것이 쓸데없이 무섭군요. 이 뒤에 나구루미성 탈취의 경위를 물으며, 서서히 호조 비판으로 옮겨, 그 다음에는 자신이 노부나가를 시중들고 나서 아케치 미쓰히데나 시바타 가쓰이에를 어떻게 꺽어낸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강한가를 어필합니다. 마지막 조에서는, 스스로를 '천도에 상협(相叶)하는 자', '만기의 정(万機の政)을 맡는 자'라고 평가하고, '천도를 거역한 우지나오에게는 반드시 천벌이 내린다' 라고 했습니다. 히데요시의 이 선전포고문은 사나다나 다테에도 도착해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는 한편, 다테와 같이 자신의 세력이 아닌 이들에게도 거취를 결정할 것을 은근히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