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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난공불락의 야마나카성 함락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난공불락의 야마나카성 함락




 덴쇼 18년(1590년) 3월 29일, 하시바 히데츠구(羽柴秀次)군이 야마나카성(山中城)을, 오다 노부오(織田信雄)군이 니라야마성(韮山城)을 공격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이 개시되었습니다.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시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덴쇼 13년(1585년)에는 시코쿠를 평정 해(모토치카 항복), 덴쇼 14년부터 15년에 걸쳐 큐슈를 평정 해(요시히사 항복), 그 사이에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도 주종 관계를 묶어(우에스기 카게카쓰 상경), 덴쇼 14년의 11월 4일부로 '관동총무사령'을, 다음해의12월 3일부로 '오량국총무사령'을 반포합니다. 이 '총무사령'이란, '다이묘끼리 사적인 분쟁을 해선 안 된다'고 하는 명령으로, '안쪽 양국(奥両)'은 무츠와 데와의 일입니다. 결국, '관동에서 토호쿠까지 일대에 있는 무장들은 전국시대처럼 마음대로 전투하지 말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인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관백의 권한으로 반포한 천하 통일의 증거라고도 말할 수 있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와서도 아직 히데요시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  호조 소운 이래, 100년에 걸쳐 관동을 좌지우지해 온 호조입니다. 결국 히데요시는 호조에 선전포고를 하고(히데요시의 선전포고), 군의를 엽니다.(오다와라 정벌 군의)



당시 상황도



 당연히 호조측도 히데요시가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군이 토카이도를 동쪽으로 돌아 온다고 판단한 호조는 본거지인 오다와라성은 물론, 이미 히데요시 산하에 들어가 버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와의 국경을 의식해, 아시가라성(小田原城), 야마나카성, 니라야마성(韮山城)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으로 적의 대군을 막으려고 성곽의 정비, 토루의 구축, 병량의 준비에 착수합니다. 이렇게 해서 선봉의 이에야스의 선발대 혼다 다다카쓰, 이이 나오마사 그리고 히데요시 자신도 3 만의 직속 군대를 인솔하고, 3월 1일에 교토를 출발했습니다. 


 27일에 히데요시군은 누마즈(沼津)에 들어갔습니다. 28일에, 이에야스와 함께 야마나카성을 정찰한 히데요시는 다음날에 야마나카성과 니라야마성에 공격을 개시할 것을 결정합니다. 덴쇼 18년(1590년) 3월 29일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이 개시되었습니다. 호조의 중신 마츠나가 고우슌(松永康俊)이 지키는 야마나카성으로 향하는 것은 히데요시의 조카 하시바 히데츠구를 총대장으로 나카무라 이치우지(中村一氏), 야마노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 히토쓰야나기 나오스에(一柳直末)가 이끄는 총원 6만 8천의 군단이었습니다.


 호조 우지마사의 남동생 호조 우지노리(北条氏規)가 지키는 나라야마성에 향한 것은 오다 노부오(織田信雄),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등 총원 4만 4천이었습니다.



야마나카성



  야마나카성은, 쇼지보리(障子堀 : 2중 해자)라고 하는 호조 특유의 축성법으로 건설된 데다, 하코네라고 하는 천혜의 요지를 이용한 난공불락의 산성이었습니다. 게다가, 타마나와성(玉縄城) 성주 호조 우지카쓰(北条氏勝)나 유력 하타모노(旗本: 쇼군 직속의 무사로 우수한 무사를 일컬음)도 도우러 와, 기나긴 공방전이 예상되었습니다만, 정작 농성하는 군사의 수는 4천~5천 이었습니다. 오후 3 시경에 시작한 야마나카성 공방전은 불과 2시간 정도로 끝나 버립니다.


 한편 니라야마성은 약 100 m 정도의 언덕 위에 구축된 히라죠오(平城)입니다. 이쪽도 농성하는 측은 고작 3천 6백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엄청난 대군인 히데요시군은 2중 3중의 포위로 성을 둘러쌓습니다. 하지만 간단히 함락되지 않고  3개월간이나 버텨 6월 24일까지 성을 수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조 측에서 난공불락이었을 야마나카성이 아주 간단하게 떨어뜨려진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고, 반대로 히데요시 측 사기가 높아집니다. 히데요시군은 그 기세인 채 단번에 진군 해, 4월 1일에는 하코네 산에, 다음 2일에는 하코네 유모토(湯本: 온천의 근원지)로 나아가, 3일에는 오다와라에 도착해 드디어 오다와라성의 포위에 착수합니다. 본격적인 오다와라성 공방전이 시작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