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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와라 정벌 개시, 히데요시의 군의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와라 정벌 개시, 히데요시의 군의



 덴쇼(연호) 17년(1589년) 12월 10일,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쥬라쿠(聚楽)에서, 호조의 오다와라성 공격의 군의를 열었습니다.



쥬라쿠(聚楽)



 시코쿠큐슈를 평정 해 관백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관동과 토호쿠였습니다. 토호쿠에서는, 요네자와(米沢城)성의 다테 마사무네와 야마가타성(山形城)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의 두 세력이 있었지만,  관동은 호조 소운 이래 100년에 걸쳐 군림해 온 호조가 당당히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호조는 호조 우지나오가 다이묘직에 있긴 했었지만, 실권은 아직 아버지인 우지마사가 잡고 있었고, 히데요시에게는 약간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토호쿠의 다테와 미카와의 도쿠가와와의 동맹을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자신의 누이 아사히히메를 보내 도쿠가와를 설득해 냈습니다. 도쿠가와는 오히려 호조에게 '상경해 히데요시를 알현할 생각이 없는가? 없다면 딸을 돌려주어도 좋다.'라고 나왔지요.


 이에 호조도 긴장해 덴쇼 16년(1588년)에는 우지마사의 동생 우지노리(氏矩)를 상경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덴쇼  17년(1589년) 10월 23일 호조의 이노마타 쿠니노리는 돌연 사나다의 나구루미성을 탈취합니다.(나구루미성 탈취) 히데요시의 '총무사령'을 멋지게 위반한 것입니다. 이 성의 위치 자체가 호조의 누마타성과는 강 하나 사이를 둔 것으로 일부러 '점령해 주세요'하는 듯한 감이 있어 히데요시의 책략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히데요시는 사죄의 의미로 우지마사, 우지나오 부자의 상경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호조는 이를 무시합니다. 이에 히데요시는 호조에 선전포고를 합니다.(히데요시의 선전포고)


 덴쇼17년(1589년) 12월 10일,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우에스기 카게카츠 등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영한 쥬라쿠에 불러, 오다와라 공격의 군의를 엽니다. 거기서 결정할 수 있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나가쯔카 마사이에(長束正家)를 자금봉행으로 해, 황금 2만매로 이세, 오와리, 미카와, 토노에, 스루가의 쌀을 매점해, 20만석을 수집한다. 


2. 토카이도의 각 역을 정비해, 거기에 군용의 파발마 50 마리를 준비한다. 


3. 출진은 덴쇼 18년 2월 1일부터 3월 1일까지로 한다. 


4.이가보다 동쪽의 토카이도 해변의 나라들과 오미, 미노의 군사로 토카이도로 쳐 올라간다.선봉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대 3만, 대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대 14만


5. 에치고, 시나노의 군사로 옛날의 칠도의 하나인 우에노, 무사시에 남하한다. 선봉은 사나다 마사유키대, 대장은 마에다 토시이에와 우에스기 카게카츠대 합계 3만 5천.


6. 츄고쿠, 시코쿠, 키이, 이세의 수군 합계 1만은 토카이도 연안을 항행해 동쪽으로 가, 오다와라를 바다에서 둘러싼다.


 이상과 같은 기본방침의 하에서, 다음날부터 조속히 준비가 개시됩니다. 이 밖에도, 해안의 각 성의 수비대를 포함하자 오다와라 공격은 총원 22만의 대군이 되었습니다. 토카이도로 가는 본대의 선봉에 이에야스를 앉힌 것은 물론, 이에야스와 호조의 결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즉, 그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때 이에야스가 자신은 에도성에 있으면서, 도요토미 연고의 무장들을 먼저 서쪽으로 향하게 한 것과 완전히 같습니다.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에게의 충성심을 보다 나타낼 수 있도록, 이 타이밍에 삼남 쵸우마루(長丸)를 인질로 히데요시에게 주고 있었습니다만, 히데요시로서는 '아직도 호조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라고 신경이 쓰이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야에스가 기꺼이 선봉을 선 것에 감동해 쵸우마루를 우너복시켜 스스로의 이름의 한자를 주어 '히데타다'라는 이름을 줍니다. 그가 2대 쇼군이 되는 히데타다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선봉의 이에야스대의 선발대로 혼다 다다카쓰, 이이 나오마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등이 2월 7일에 출진하고, 히데요시 자신도, 3월 1일에 교토를 출발해, 오다와라 공격이 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