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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우에스기의 전국 굴지의 금광 사도섬 공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우에스기의 전국 굴지의 금광 사도섬 공략



 덴쇼 17년(1589년) 6월 12일, 에치고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사도(佐渡)에 건너가, 가와하라다성(河原田城)을 공격해 성주 혼마 타카토(本間高統)이 할복 했습니다. 



사도섬의 위치



 사도는 일본에서 최대급의 금의 산지입니다. 사도의 금산(佐渡金山)의 대명사인 아이카와 카나야마(相川金山)는, 게이쵸 6년(1601년)에 발견된 것으로, 오늘의 이야기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츄고쿠의 패자가 된 모리의 첫 번째 발걸음이 모리와 아마고의 은광 쟁탈전이었던 것처럼, 금광은 누구던 손에 넣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도섬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사도 수호대인 혼마 가문이 통치하는 섬으로 우에스기 겐신의 시대에는, 카나보리(광부)들을 보내는 등  관계를 쌓아 올리고 있었습니다만, 완전하게 지배하에 둔것은 아니었습니다.하지만 당시 혼마 가문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 였습니다. 


 서 미카와 카나야마(西三川金山)의 하모치(羽茂) 혼마 가문, 아라호(新穂) 카나야마의 구지(久知) 혼마 가문과 카타가미(潟上) 혼마 가문, 츠루코 은광(鶴子銀山)의 가와하라다(河原田) 혼마 가문과 사와네(沢根) 혼마 가문의 5개의 분가로 분열하고 있었습니다.



사도섬 공략 전황도



 이윽고 덴쇼14년(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에 따라 상경을 완수해, 정식으로 도요토미의 산하가 된 우에스기 카게카츠(우에스기 카게카쓰 상경하다)는 히데요시에게서 사도 토벌의 허가를 얻은 후, 재삼에 걸쳐 혼마 가문에게 카스가야마성으로 올 것을 요청합니다. 히데요시의 요청에 응답해 상경하면 도요토미의 산하가 되는 것처럼, 카게카츠의 요청에 따라 카스가야마성에 가는 일은 즉, 우에스기의 산하가 되는 일을 의미합니다. 물론, 카게카츠의 목적은 사도의 카나야마를 지배하에 두고, 그 이익을 얻는 일이지요. 그러나, 당연하게도 혼마가 순조롭게 응할 것은 없었습니다.


 좋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초조해지던 카게카츠의 중신, 나오에 키네츠구(直江兼続)는 위의 혼마가문의 분열을 이용하려 합니다. 원래 하나의 가문이었던 것이 분열했다고 되면, 거기에는 많은 군열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현재의 사도에서 하모치 성주인 하모치 혼마 타카모치(羽茂本間高茂)와 가와하라다 성주인 가와하라다 혼마 타카쯔나(河原田本間高統)가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도 공격의 총사령관이 된 키네츠구가 주목한 것은 그들에게 압박당하던 사와네(沢根)와 카타가미(潟上) 혼마 가문 이었습니다. 키네츠구는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내통을 종용합니다. 결국 사와네 혼마 사마노스케(沢根本間左馬助)가 내통에 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덴쇼 17년(1589년) 6월 12일, 카게카츠, 카네츠구가 1,000여 척의 큰 선단을 통솔하고 사도로 향해, 은밀하게 마노만에 침입합니다. 사마노스케의 안내에 의해, 3,000 에서 수만이라고도 추정되는 대군이 늪에 상륙합니다. 우에스기의 상륙을 안 혼마는 잇달아 가와하라다성(河原田城)으로 집결하지만 모든 군세를 합해도 500 정도 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까지 시마우치에서의 소규모의 전투의 경험 밖에 없는 쿠니진들이었습니다. 그 상대가 되는 것은 히데요시에 복종하긴 했으나, 전국의 굴지의 영주 우에스기입니다.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에다가 사마노스케의 군사가 지른 불에 의해, 가와하라다성은 불길에 싸여 함락되고 혼마 타카토 불타는 성 에서 할복 했습니다.


 가와하라다성의 낙성을 안 쿠니진들은, 잇달아 사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하모치성(羽茂城)이 남아 있었습니다. 16일, 하모치성 근처에 진을 친 우에스기군이 총공격을 개시햇습니다. 죽림에 숨어 저격 한다고 하는 게릴라 작전을 전개한 하모치 혼마였지만, 벌써 다른 사도의 국민을 아군에 더한 우에스기군에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하모치성도 이 날에 함락되어, 성주 다카모치(高茂)는 성을 탈출해 아키타에 도망가나 배가 폭풍우에 휩쓸려, 아키타가 아닌 에치고로 표류해, 우에스기군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의 카나야마는 우에스기의 것이 됩니다. 사도의 지배를 맡은 카네츠구는 우에다중이나 요이타중을 대관으로 사도에 두어, 카나야마 경영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나, 세키가하라와 동시에 발발한 하세도우 전투(長谷堂の戦い)에서 서군에 붙었기 때문에, 카나야마의 경영권은 도쿠가와의 것이 된데다가 유명한 아이카와 카나야마가 발견되어 도쿠가와의 자금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