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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호조와 사가미의 대진, 제 2차 코우노다이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호조와 사가미의 대진, 제 2차 코우노다이 전투



 에이로쿠7년(1564년) 호조 우지야스군이 에도강을 넘어 다이간(対岸)에 포진 하는 사토미 요시히로(里見義弘)군에 기습공격을 개시한 '제2차 코우노다이 전투'가 있었습니다. 



사토미 요시히로 목조상



 호조가는 텐분 15년(1546년)의 카와코에야전(카와코에 전투)에서 승리해 쿠보나 관동 관령이라고 하는 구세력을 이름만 남은 상태로 한 뒤 관동 북부에 세력을 늘려서 갑니다. 사토미가도 호조와 일촉즉발인 상태에서 관동에 세력을 늘릴 찬스를 계속 노리고 있었습니다.  제1차 코우노다이 전투(1차 코우노다이 전투)로부터 약 30년이 흘러 호조와 사토미 각각의 당주가 후대로 이어져 다시, 이 땅에서 자웅을 결정할 시기가 옵니다. 이번 전투에는 호조와 사토미 만이 아니고  여러 전국 굴지의 거물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가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과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이 이번 전투에 발을 담그게 됩니다.


 에이로쿠4년(1561년) 호조로 인해 이미 이름만이 남은 관동 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에게서 그 관동 관령직을 이어받은 우에스기 겐신은 관동의 사소한 다툼을 중재해야 할 의무가 지워집니다. 신슈(信州)의 국경 부근으로부터 에치고를 위협하는 다케다 신겐을 막는 동시에 관동에 세력을 늘리는 호조 우지야스와도 싸우게 된 것입니다. 



코우노다이 전황도(1)




 제4차 가와나카지마(하치만바라 전투) 후에 겐신은 매년 관동에 출진합니다. 하지만 굉장한 성과는 얻지 못하고, 관동은 여전히 호조가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한편의 신겐은 가끔 우에노등에 진공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에이로쿠6년(1563년) 겐신은 사토미 요시히로에게 밀사를 보내 관동에 진출한 신겐의 배후를 찌르도록 요청합니다. 겐신의 요청을 수락한 요시히로는 다음 해 에이로쿠7년(1564년)이 밝자마자 행동을 개시합니다. 요시히로는 무사시(武蔵)의 오오타 스게마사(太田資正)와 협력해 시모우사로 진공합니다. 이 때, 사토미군에 참가한 오오타 일족 중에 오오타 야스스게(太田康資)가 있었기에 호조 우지야스가 격노합니다. 그는 우지야스의 사위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위가 동맹국인 신겐을 공격한 것에 분노한 우지야스는 행동을 개시합니다.


코우노다이 전황도(2)


 그는 2만의 대군을 인솔하고 토네강가와(利根川) 근처 다이간에 포진 했습니다. 호조군은 얕은 여울을 단번에 건너 기습을 겁니다. 허나 이것을 사전에 알고 있던 사토미군은 시원스럽게 반격해 이 날의 전투는 사토미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코우노다이의 진에서 연회를 열어 맛좋은 승리의 술을 마시는 사토미군의 진 앞으로, 어둠에 묻혀 은밀하게 호조군은 그들을 포위합니다.  승리의 환희에 빠져 있는 사토미군에게 날이 밝자마자 호조군은 총공격을 실시합니다.  방심하고 있던 사토미군은 보기 좋게 당하고 말지요. 기록에 의하면 이 때의 사토미측의 사상자는 5,300명. 한편 호조군도 3,700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으로 호조의 대승이라고 부르는에는 거리가 먼 격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건 승리는 승리, 패배는 패배지요. 요시히로는 당황해 안보의 거점 이와쯔기(岩付) 성으로 패주 합니다. 아까 분명 겐신과 신겐이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어디있냐? 는 궁금증이 생기실 텐데요.  신겐이, 무츠 남부의 모리우지(芦名盛)에게 겐신의 뒤를 쳐달라고 요청해, 이것이 곧 제 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로 이어집니다만, 이때는 큰 충돌은 없었지요.  그 후 겐신은 호쿠리쿠에 신겐은 토카이로 노선을 변경했기 때문에 우에스기 다케다의 전투는 당분간 없게 됩니다. 오히려 다케다와 호조의 동맹군의 이마가와가와의 전투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