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모토나리, 아마고가의 방어선을 뚫다; 하쿠로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모토나리, 아마고가의 방어선을 뚫다; 

하쿠로쿠성 공방전



 에이로쿠6년(1563년) 모리 모토나리가,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아마고가의 이즈모(出雲) 하쿠로쿠성(白鹿城)에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당시의 세력도



 이와미 은광을 탈취한 모토나리는(이와미 은광 쟁탈전) 드디어, 아마고가의 이츠모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엔로쿠5년(1562년) 차남 깃카와 모토하루,삼남 고바야카 다카카게와 함께 총원 1만 5,000의 군사를 인솔한 모토나리는 이와미를 경유해 이즈모로 들어옵니다. 이 행동만으로 많은 이즈모의 쿠니진들이 시원스럽레 아마고를 단념해 모리의 산하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아라와이(洗合)에 도착한 모토나리는 츠케시로을 구축합니다. 동시에 아마고의 본거지 갓산토다성을 견제하기 위해, 거기에서 북동에 위치하는 하쿠로쿠성에서 토미타성을 고립시키려합니다. 아마고가는 본거지의 토다성을 지키기 위해, 영지 내에 '아마고10기'라 불리는 성들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하쿠로쿠성은, 그 10기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성이었습니다. 바다에 접해, 해상의 현관문의 역할을 하는 이 성을 점거해 버리면, 아마고는 바다에서 자금 반입이 불가능하게 되는 요충지 이지요. 



모리 다카모토의 죽음은 미스테리 중 하나입니다



 모리가 하쿠로쿠성을 둘러싸기 시작하는 도중에 아마고가의 중신 쿠마가이 세이아(熊谷西阿)가 배신해 모리의 차지가 된 미토야성(三刀屋城)에 쳐들어갑니다. 그러나 기습을 받아 대장 세이아는 전사하고 이어서 아마고의 우야마(宇山)와 우시오(牛尾)가 미토야성에 공격을 합니다. 하지만 모리의 대군이 원군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 시원스럽게 공격을 그만두고 돌아가 버립니다. 모토나리는 당시 세력을 서쪽에도 늘리기 위해, 아마고가 공격과 동시에 큐슈에도 손을 대고 있어 북 큐슈에 군림하는 오오토모 소린과 싸우고 있었으나 이즈음 해서 소린과 화해합니다. 큐슈 전선을 맡기고 있던 장남의 모리 다카모토(毛利隆元)를 차남, 삼남과 함께 이 하쿠로쿠성 공격으로 참가시킬 생각으로, 이즈모에 불러옵니다. 그런데 이즈모로 향하던 도중 행군 안에서 타카모토가 급사해 버립니다. 지나친 급사에 독살설도 있을 정도입니다. 



히쿠로쿠성



 하지만 모리 모토나리는 장남의 죽음으로부터 불과 9일 후 하쿠로쿠성에 총공격을 합니다. 하쿠로쿠성의 성주는 용장으로 알려진 마츠다 사네야스(松田誠保)지만 그에게는 단지 1,800의 병사 뿐이었습니다. 모토나리는 그보다 훨씬 많은 군사를 가지고는 있지만 결코 방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와이에 있는 은광의 항부 수백명에게 지시해, 땅굴을 팝니다. 땅굴로 성의 우물을 파괴해서 물의 보급을 끊고, 게다가 그 지하 통로를 사용해 성내에도 침입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용장으로 이름 높은 사네야스는 좀처럼 침입을 허락하지 않고 땅굴로 병사를 내보내 과감하게 직면합니다. 그렇게 농성을 하던 중, 성의 위기를 우연히 들은 아마고가의 당주 요시히사의 남동생 아마고 토모히사(尼子倫久)가 1만의 군사를 인솔해 하쿠로쿠성을 포위한 모리군을 공격합니다. 


 처음에는 원군의 모습에 불리하게 된 모리군이었지만, 전국시대 굴지의 영웅 모리 모토나리는 당황하지 않고 밤에 야습을 걸어 원군을 무찌릅니다. 이일로 하쿠로쿠성 내가 동요한데다가 물이 바닥나 더 이상 농성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80일간이나 2천도 되지 않는 병사로 견딘 하쿠로쿠성은 무너지고, 모토나리는 아마고가의 본거지 갓산토다성으로 향합니다. 제 2차 갓산토다성 공방전의 서막이 밝아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