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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쵸쇼카베 모토치카, 모토야마가를 멸망시키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쵸쇼카베 모토치카, 모토야마가를 멸망시키다



 에이로쿠 7년(1564년) 쵸쇼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가 모토야마성(本山城)의 모토야마 치카시게(本山親茂)를 공격해서 우리우노(瓜生野)로 쫓아 냈습니다.



쵸쇼카베 모토치카


 에이로쿠 3년(1560년), 토사(土佐)를 둘러싼 나가하마오모테(長浜表) 전투로 첫 출진을 장식한 쵸쇼카베 모토치카. 그는 잘생겼지만 살이 희고 언행이 부드러운데다 사람을 만나도 거의 말하지 않고, 하루종일 방에서 시간을 보내 가신에게서는 '젊은 공주님(姫若子)'이라는 별명이 붙고, 아버지 마저 후계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첫 출진으로 훌륭한 활약을 합니다. '공주님'이라는 별명은 이 이후로 '토사의 걸물'로 바뀌고, 아버지도 모토치카를 인정하고, 모토야마를 무찌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모토치카는 15명이던 가신을 17명 32명으로 늘리고 세력 확대에 착수합니다. 모토치카는 무공에 따라 가신들에게 성이나 영지를 아낌없이 하사해 그 사기를 높입니다. 한편으로는 항복한 자에게 옛 영토를 그대로 맡게 해 전쟁을 하지도 않고 세력을 늘려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투에서 소실한 신사나 절의 수복도 적극적으로 실시해 민심도 손에 넣습니다. 나가하마오모테 전투로 나가하마성(長浜城)을 빼앗긴 모토야마가는 아사쿠라성(朝倉城)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토치카의 인심장악책으로 인해 주위의 성들이 모토야마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그들은 결국 토사에의 영향력을 잃고 모토야마성으로 퇴거합니다.



당시 시고쿠 상황



 게다가 그 다음 해 에이로쿠7년(1564년) 모토야마가의 당주였던 모토야마 시게토키(本山茂辰)가 병사하고 아들 모토야마 치카시게가 뒤를 잇습니다. 이것을 호기로 파악한 모토치카는 모토야마성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모토야마성은 견고하기로 널리 유명한 성이었기 때문에 공성은 그다지 쉽지 않았습니다. 모토치카는 여기서 한가지 책을 생각해냅니다. 모토야마성의 서쪽에는 토사 모리군의 영주 모리가 수습하고 있던 모리성(森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토야마가 성을 점거한지 꽤나 오래됬었지요. 모토치카는 자신을 의지해 도망쳐 온 모리 타카요리(森孝頼)의 원한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모토치카는 타카요리를 원래 영지를 회복하라며 모리성으로 보냈습니다. 모리성의 지리적인 측면을 꿰고 있는 타카요리는 복수심을 불태우며 훌륭히 모토야마군을 교란합니다. 



모토야마가 멸망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치카시게는 모토야마성을 방폐해 우라도성으로 철퇴했습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모토치카가 쫓고 결국 에이로쿠 11년(1568년) 치카시게는 항복합니다. 모토치카는 여기서도 예의 인심장악법을 이용합니다. 그를 스스로의 가족으로 맞이해 그의 세력을 그대로 흡수한 것이지요. 아무튼 이 일로 모토치카는 토사를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쪽의 이치죠가와 동쪽의 아키가와 대치하게 되지요. 이 때 모토치카의 가신이 된 치카시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큐슈를 정벌할 때 벌인 토츠키가와 전투(토츠키가와 전투)지키고 장렬히 전사한다고 하니, 모토치카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잘 움직였는 지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