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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바타 가쓰이에의 배수의 진, 야스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바타 가쓰이에의 배수의 진, 야스가와 전투


 겐키 원년(1570년) 오다 노부나가가 쵸우코지성(長光寺城)을 맡긴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가 롯카쿠 부자를 물리친 야스가와 전투(野洲川の戦い)가 있었습니다.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위기에 빠진 노부나가는 겨우 교토로 돌아왔습니다.(가네가사키 퇴각) 그리고 교토를 나와 본거지 기후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도중 비와호(琵琶湖)의 동남에 위치하는 쵸우코우지성의 성주로 시바타 가쓰이에를 임명해, 여기를 지키게 했습니다. 노부나가의 철퇴를 호기라 파악한 것은 다름아닌 롯카쿠 죠우테이(六角承禎), 타카하루(義治) 부자 였습니다.  롯카쿠가는 노부나가 상경때에 대패해(칸노우죠성 전투) 이후, 코우가나 이세등에서 단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간신히 기후로 돌아와, 불과 400명 정도의 군사를 이끈 가쓰이에가, 쵸우코지성를 지키게 되었으니, 죠우테이로서는 이 성을 공격하는 것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전황도



 노부나가가 기후로 돌아간 그날, 롯카쿠 부자는 잇코우잇키를 포함한 약 4,000의 군세를 인솔하고, 쵸우코지성으로 진군합니다. 10배의 수의 차이가 있어도, 그것을 견뎌내는 맹장 가스이에에 혀를 내두를 무렵, 죠우테이에게 낭보가 닿습니다. 원래 이곳을 다스리던 롯카쿠에게 지역 주민들이 정보를 준 것 이지요. '이 쵸우코지성에는 우물이 없어 물을 성의 밖에서 길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차단하면, 물이 없어지므로 성 함락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는 것이었지요.


 조속히, 성으로 물을 운반하는 길목을 차단한 죠우테이는 10일 정도 지났을 무렵 성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사자를 보냅니다. 항복을 권하는 사자에게 가쓰이에가 '상의를 해 보겠다'라며 답을 피하자, 사자는 성내의 물의 양을 확인하려고 다음과 같이 부탁합니다. '손이나 얼굴을 씻고 싶어서 그런데 물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가쓰이에는 성내의 사람이 두 명에게 대량의 물을 옮기게 해 씻게하고, 남은 물은 모두 뜰에 버렸습니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말을 물로 씻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요.


 사자는 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롯카쿠군은 지금부터 장기전이 될 것이다라 예상하고 작전을 변경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가쓰이에의 작전이었습니다. 사실 성내의 물은 거의 바닥나고 있었습니다. 얼마 뒤 그는 성내에 남은 물을 한 곳에 모으고, 병사들에게 고합니다. 



물통을 파괴하는 가쓰이에



'물은 이제 이만큼 밖에 없다! 어차피, 말라 죽는다면 싸우다 죽자!'


 이렇게 선언한 뒤 남은 물을 병사들에게 마음껏 먹이고 사기를 높이고 물이 들어가 있던 장독을 차례차례로 부숴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선두에 서 성밖으로 나가 성을 포위하는 적진을 향해 돌진해 갔던 것입니다. 장기전을 예상하고 여유를 두고 있던 롯카쿠군과 명실공히 배수의 진으로 공격하는 가쓰이에군의 전투는 그 결과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 승리의 보고를 들은 노부나가는 감동해 가쓰이에에게 내린 표창장에는, '카메와리(瓶割; 병을 깬) 시바타 귀하'라고 수신란에 적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소우켄기(総見記)」, 「부케지기(武家事紀)」 「 신무샤 모노카타리(新武者物語)」 등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만, 현재는 아마 창작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