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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노부나가 포위망 형성, 테즈쯔야마성, 가네가사키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노부나가 포위망 형성, 

테즈쯔야마성, 가네가사키성 공방전


 겐키 원년(1570년) 4월 26일,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든 상경을 완수한 오다 노부나가가, 에츠젠의 아사쿠라씨를 공격한 테즈쯔야마성(手筒山城), 가네가사키성(金ヶ崎城)의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도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이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여동생 오이치노가타(오이치노가타)의 최초 결혼상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와 싸우는 유명한 아네가와 전투로 격화되는 에츠젠, 아사쿠라가 공격의 전토전입니다. 이 2년전, 무로마치 막부 마지막 쇼군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어 상경을 완수한 노부나가는 각지의 전국 다이묘에게 상경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속 거절하고 있던 것이 바로 에츠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였습니다. 게다가 이무렵 요시아키에 대해, 노부나가는 '천하의 일은 나에게 맡겨 말참견 하지 말아라' 등을 요시아키에게 요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전황도



 요시아키도 입다물고 당하기만 하지 않고 각지의 영주와 상담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들을 눈치챈 노부나가는 당하기 전에 선공을 하기 위해 아사쿠라를 공격한 것이 이번 '테즈쯔야마성, 가네가사키성의 공방전'입니다. 이 전투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위시한 토카이, 킨키의 무장도 동원되어 군세의 수는 10만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노부나가는 이 전투로 아사쿠라를 망칠 생각 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본거지인 잇치쥬골짜기(一条谷)로부터 원군을 파견합니다만, 그래도 아사쿠라군의 총수는 불과 1만뿐이었습니다.


 겐키 원년(1570년) 4월 오다군의 공격을 아사쿠라군은 분전을 거듭하며 막았지만 결국 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지요. 농성을 포기하고, 성주 아사쿠라 카게쯔네(朝倉景恒)는 성문을 열어 항복합니다. 이대로, 아사쿠라를 멸망시킬 생각으로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와 키노시타(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성을 맡기고 카게쯔네가 있는 잇치쥬골짜기를 목표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노부나가에게 급보가 도착하니, 여동생 오이치노가타의 남편 아자이 나가마사가 아사쿠라에 가세 했습니다. 두 세력은 원래 오랫동안 동맹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그것을 알고 귀여운 여동생을 시집가게 해 자신의 아군으로 하랴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 세력은 협력해 아자이는 북 오미, 아사쿠라는 에츠젠에서 지리적으로 완전하게 유리한 협력입니다. 



가네가사키 퇴각이 있었던 곳



 노부나가는 일단 잇치쥬골짜기를 포기해 철퇴를 결의하니, 이것이 바로 '가네가사키 퇴각(金ヶ崎の退き口)'입니다. 이 때의 철퇴로, 히데요시가 후미를 맡아 분전 한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소중한 여동생을 신부로 줬는데도 배반한 아자이가에 격노한 노부나가는 이후에 나가마사의 본거지 코타니성(小谷城)을 공격한 '아네가와 전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날 구사일생한 아사쿠라도 아자이와 함께 아네가와의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