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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반 노부나가 동맹의 서막, 가네가사키 퇴각

일본 전국시대;

반 노부나가 동맹의 서막, 가네가사키 퇴각


 겐키 원년(1570년)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가네가사키성을 공략한 오다 노부나가군에, 아자이 나가마사가 배반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전군이 철퇴를 개시한 가네가사키 퇴각(金ヶ崎の退き口)가 있었습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초상화


 당시 노부나가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토로 상경할 때 남 오미의 롯카쿠를 추방하고(칸노우죠성 전투) 북 오미의 아자이가에는 귀여운 동생을 시집보낸 동맹 관계였지요. 미노는 3년전에 손에 넣었고(이나바야마 공방전),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아들 노부야쓰에  딸 도쿠히메(도쿠히메)를 시집가게 해 아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경을 접하는 유일한 나라는 에츠젠의 아사쿠라가 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와카사의 국민 무토 토모마스(武藤友益)가 종종 노부나가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을, 당시의 아사쿠라의 당주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상경해 변명을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요시카게는 그 요구를 계속 무시하지요.


 사실 아사쿠라가와 오다가는 원래 이 근처 일대 수호였던 시바(斯波)가의 신하를 입니다. 하지만 아사쿠라는 그 중에서도 수호대를 맡았던 명문인 반면, 오다가는 가신의 가신이었던 것으로, 완전하 격하인 입장입니다. 둘의 갈등은 격화되어 결국 겐키 원년(1570년) 노부나가는 총원 3만의 군세를 인솔하고, 아사쿠라를 토벌 하기 위해서 교토를 출진합니다. 이것이 테즈쯔야마성, 가네가사키성 공방전입니다.  아자이 나가마사는 이에 위기감을 가지지요. 원래 아자이가와 아사쿠라가는 서로 지지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지요. 오다와 동맹을 맺을 때에도, '아사쿠라는 공격하지 않는다'라는 조건을 포함시켜 두었었지요. 오다와의 동맹이 불과 2년에 지나지 않지만 아사쿠라와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가마사는 결국 아사쿠라를 택합니다. 거기에 무엇보다, 나가마사에게 아사쿠라에 붙는 것이 승산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포진도




 이 아사쿠라씨에게의 공격이 이 앞, 노부나가를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는 노부나가 포위망, 겐키 쟁란(元亀争乱)의 개막이 되었기 때문에입니다. 쇼군의 힘을 빼았긴 요시아키가, 전국 각지의 영주에게 자신을 도와주도록 간절히 부탁해 , 공격을 받은 아사쿠라는 그 부탁에 응합니다. 더욱이 아사쿠라만이 아니고, 노부나가가 힘을 기르는 일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차례차례로 반노부나가의 의지를 표명하고, 노부나가를 몰아넣고 있었지요. 아자이, 아사쿠라를 포함해 전국에 신자를 가지는 이시야마혼간지를 지원하는 서부의 영웅 모리 모토나리, 가마쿠라 시대 수호를 맡았던 명문 다케다 신겐, 도리를 존중하는 우에스기 겐신이라고 하는데다 히에이잔렌라쿠지를 더한 '반노부나가 동맹' 이 여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이노가타는 남편보다 오빠를 택했습니다



 노부나가는 이 나가마사 배반의 소식을 아사쿠라가 추방한 가짜 정보라고 생각해, 좀처럼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에츠젠의 아사쿠라와 북 오미의 아자이의 협공에 당한다라는 가신의 진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노부나가에게 아자이로 시집간 여동생(오이치노가타)의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팥을 채운 양쪽을 끈으로 묶은 봉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봉투를 보고, '독안에 든 쥐'와 대응되는 '봉투안의 팥' 즉 이 선물이 현재 자신이 놓여진 상황을 알려 준 것이지요. 이에 노부나가는 즉시 전군에 철퇴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기를 놓쳐, 불과 10명 정도의 친위대를 대동하고 진군했던 경로를 피해 와카사를 지난 남하를 택한 데다가 도중 , 타카시마군의 쿠츠키골짜기(朽木谷)를 통과했을 때에는, 그곳의 무장 쿠츠키 모토쯔나(朽木元綱)가 투구와 갑옷을 갖춘 채로 나타나 죽음을 각오하기 까지 했으나, 그를 자신의 편으로 하는 일에 성공한 오다는 까사스로 교토로 귀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