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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요시나리 전사, 우사야마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요시나리 전사, 우사야마성 공방전


 겐키 원년(1570년) 오미의 우사야마성에 쳐들어간 아자이, 아사쿠라군이 오다군과 격전을 벌여, 성주였던 모리 요시나리가 전사 했습니다.



모리 요시나리 초상화



 텐분 22년(1553년)에  노부나가의 모리야꾸(傅役;전국시대 무장의 스승)인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가 죽은 뒤에(히라테 마사히데의 할복) 생긴 구멍을 매운것이 바로 모리 요시나리(森可成)입니다. 전국시대를 잘 아시는 분이라면 그 모리 란마루(森蘭丸)의 아버지라고 하는 편이 알기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코우지 3년(1557년)에는, 오다와 적대하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에게 '가신 토바 나오마사(戸部政直)가 오다에 배신을 획책하고 있다'하는 내용의 가짜의 편지를 보내려, 스스로가 상인으로 변장해 이마가와의 영지에 잠입해 자신의 손으로 요시모토의 측근에 건네준다고 하는 닌자 뺨치는 임무를 해 내기도 했습니다. 


 에이로쿠 3년(1560년)에 일어난 오케하자마 전투(오케하자마 전투)에서도 기습을 위해 조용히 말을 끌고 가려는 노부나가에게, 어짜피 비가 오기 때문에 말을 타서 속도를 살리자는 진언을 하지요. 그의 진언으로 요시모토가 죽었다 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상경 후에는 시바타 가쓰이에나 니와 나가히데와  교토 주변의 치안 유지에 노력합니다. 정치력도 나빴던 것 같지 않습니다. 얼마 뒤 노부나가는 그에게 오미의 우시야마성의 성주에 앉힙니다. 그리고 얼마뒤 아사이, 아사쿠라군과 노부나가군 사이의 전투가 발발합니다. 이네가와 전투에도 모리 요시나리는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웠었습니다. 그 뒤 노부나가의 본 부대는 이시야마 혼간지와 충돌이 발생해 주력은 셋츠에서 활동 중이었고, 요시나리가 맡은 우사야마성은 노부나가군 최북부의 전선이 된 것입니다. 



우사야마성(宇佐山城)의 흔적


  얼마 뒤 혼간지와 동맹을 맺은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이 약 30,000만의 대군을 이끌고 우사야마성으로 쳐들어 옵니다. 노부성(野府城)을 맡고 있던 노부나가의 남동생 오다 노부하루(織田信治)가 급히 가세했지만, 그래도 약 1,000여명 정도였습니다. 사카모토에 진군해온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를요시나리, 처음에는 아사쿠라 카케아키라(朝倉景鏡)의 군을 물리치는 등의 건투를 보입니다. 하지만 10배가 넘는 수를 가진 적을 이길리도 없어, 요시나리와 노부하루는 장렬히 전사합니다. 여세를 몰아 진군한 아저이, 아사쿠라군은 그대로 우사 산성을 공격하나, 명장 밑에 있었던 병사들은 분전에 분전을 거듭해 어떻게든 성의 점령을 막습니다.


 그 날에 우사야마성을 점령할 수 없었던 어저이,아사쿠라군은 주변에 불을 질러, 보급을 끊고 성을 점령하려 하나, 그 무렵에 이 상황을 안 노부나가가, 즉석에서 셋츠의 주력을 철퇴시켜 기나이의 장병을 모아 표적을 코사이의 아사이, 아사쿠라 연합군에 좁혀 진군을 개시합니다. 결국 우사야마성은 노부나가의 도착까지 버텼습니다. 덧붙여서 이 싸움으로 동생 노부하루와 총신인 요시나리를 잃은 노부나가의 분노가, 이윽고 폭팔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