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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시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조선과 관계수복의 노력, 포로송환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조선과 관계수복의 노력, 포로송환 게이쵸 5년(1600년) 3월 2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소 요시토시(宗義智)등이 조선에 강화를 요청해, 포로 160명을 송환했습니다. 아마쿠사 제도를 포함한 히고 4군의 영주 고니시유키나가, 나가사키 봉행인 데라자와 히로타카, 대마도 주 소 요시토시의 영지는 모두 조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의 처리의 주도를 그들이 하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의 야욕이 낳은 조선 침략은 두 차례에 걸쳐 실패하고, 결국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임진왜란 종결) 그 유언에 따라 철퇴하게 됩니다.그리고 일본 내의 정세가 급변해 포로 송환이 이루어진 게이쵸 5년 중에 세키가하라전투가 있기도 했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성 편; 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2) 벽 일본 전국시대 성 편;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2) 벽 전국시대의 성을 보호한 것은 해자(해자)와 벽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전국시대의 성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성벽 성을 둘러싸는 장벽이 바로 성벽입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의 무가 저택은 주위에 담을 세우고, 전장에서는 목책을 만들어 적을 금족 했습니다. 성벽의 재질 헤이안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의 무가 저택은 널판지의 벽으로 저택을 방비했습니다. 이것을 '이타베(板塀)'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벽은 적의 파괴 공작이나 화살이나 철포, 화재에는 약했기 때문에 점차 공법이 변화되게 됩니다. 방탄을 위해 널판지를 겹치고 위에 지붕을 붙이고, 버팀목으로 기둥을 세웠습니다. 또, 이중의 판으로 담을 만들어, 판과 판 사이에 모래, 점토등을 넣는 '타이고..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성 편; 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1) 해자 일본 전국시대 성 편;일본 전국시대 성의 구조(1) 해자 저번 편에서 일본 전국시대의 성의 종류(일본 전국시대의 성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면, 이번에는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해자의 구조 성곽 방위의 기본이 되는 것이 해자입니다. 선사시대 부터 지면에 구멍을 길게 파 외부의 침입을 방해하는 것은 가장 확실하고도 단순한 방어 방법이었습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굴착 기술도 향상해, 전국시대의 성곽에는 복잡하고 교묘한 해자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해자라고 하면 물을 가득 채운 수호(水濠)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성곽의 해자는 물이 없는 카라호리(空堀) 도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카라호리는 '적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중점으로 한 것으로 직접적인 낙사나 카라호리 안에서 꼼짝 못하는 적..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성 편; 일본 전국시대의 성의 종류 일본 전국시대 성 편;일본 전국시대의 성의 종류 예전부터 성곽은 마을이나 거기에 사는 사람, 재산, 주변의 경작지,항만 시설 등을 외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방위 거점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인간이 정주 생활을 영위하게 된 죠몽 후기에서 야요이 시대에 취락 전체를 환호(環濠:구덩이)로 둘러싸 신분제의 발달과 함께 영주의 관을 보다 엄중하게 방어하는 것으로 발전했습다. 무가 사회의 성립기가 되고 나서는, 타 세력과의 항쟁을 중점으로 해 영주 저택은 한층 더 거대화, 요새화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 입니다. 당연히, 성을 만드는 장소는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 곳이 선택되어 그 풍토나 성주 마다 독자적인 개량을 더해져 건설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성의 입지에 관해서 주된 유형은 아래의 3 형식으로 분류됩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야에스가 오사카성에 들어가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야에스가 오사카성에 들어가다 게이쵸4년(1599년) 9월 27일, 삭발해 교토 산본기(三本木)에 은거한 기타노만도코로(고우다이인)에 대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성 니시노마루(西ノ丸)에 들어 갔습니다. 게이쵸 3년 (1598년)의 8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이때까지, 오사카성의 니시노마루에 있던 기타노만도코로(고우다이인)는 삭발해 비구니가 되어, 교토 산본기의 저택으로 옮깁니다. 다음날의 게이쵸4년(1599년) 9월 27일에, 당시 거점으로 하고 있던 후시미성에서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려 이야에스가 오사카 성의 니시노마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에 도요토미를 멸하러 이동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데요시는 유언으로 후시미성에..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시다 미쓰나리 습격당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시다 미쓰나리 습격당하다 게이쵸 4년(1599년) 윤 3월 4일, 가토 기요마사등 도요토미가의 가신 7명이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습격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를 낳는 도요토미 가문 내의 분쟁은, 히데요시 만년의 무렵부터 그 징조가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제일의 표적이 된 것은 다름아닌 이시다 미쓰나리였습니다. 그는, 원래 오미의 토호의 아들이었습니다. 덴쇼 2년(1574년), 아직 기노시타 도키치로라 자칭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처음으로 주어진 오미의 영지를 순방하고 있었을 때, 처음으로 받은 영지를 지나치게 열심히 보던 그는 지치고 목이 말라 차를 부탁하려고고, 문득 찾아낸 절에 들어갑니다. 차를 부탁한 히데요시에게 어린 승려가 나와, 차를 줍니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단숨에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임진왜란이 종결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임진왜란이 종결하다 게이쵸 3년(1598년) 11월 20일, 끝까지 주둔하던 시마즈 부대가 철퇴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두번째 일으킨 한국 침략 정유재란(게이쵸의 역)이 종결 했습니다. 호조의 오다와라성을 점령해(호조가 멸망), 오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를 부하로 삼아(오다와라성에서 히데요시를 만나다) 드디어 천하를 수중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무모한 조선 침략을 개시합니다. 분로쿠 원년(1592년)부터 분로쿠 2년에 걸친 제1차 한국 침략, 임진왜란(분로쿠의 역)이 휴전한 뒤 강화회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경한 히데요시는 14만의 대군을 다시 조선에 보내 침략을 개시합니다. 명의 원군뿐만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발발하는 의병에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병상의 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병상의 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 게이쵸 3년(1598년) 8월 9일, 병상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마에다 토시이에등을 불러, 히데요리의 장래와 조선에서의 철군을 맡겼습니다. 이 해의 5월 부터 컨디션이 무너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서히 악화되는 병에, 자신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거성인 후시미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를 소집해 나라의 장래나, 아들인 히데요리의 장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유언인 듯한 부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이쵸 3년 8월 9일, 병상의 히데요시는 사방침(팔꿈치를 걸치는 배게)에 의지하면서 일어 납니다. 그 앞의 왼쪽으로는 도쿠가와 이야에스, 마에다 토시이에, 다테 마사무네, 우키타 히데이에가 앉아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모리 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히데요시가 영주들에게 충성의 서약을 요구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히데요시가 영주들에게 충성의 서약을 요구하다 게이쵸 3년(1598년) 7월 15일, 와병 중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재 영주에 대해 히데요리에게의 충절을 맹세하는 서약을 요구했습니다. 즉 히데요시는 자신의 사후, 신속하게 아들인 히데요리에게 바톤 터치 할 수 있게, 영주들에게 맹세하게 한 것입니다. 이 1개월 후, 히데요시는 저 세상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2년 후의 게이쵸 5년(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어, 또 15년 후의 게이쵸 20년(겐나 원년 1615년)에 일어난 '오사카 진'으로 도요토미가는 멸망하게 됩니다. 분카 9년(1812년)에 쓰여진 「폐절록(廃絶録)」과 메이지 24년(1891년) 쓰여진 「도쿠가와제봉록(徳川除封録)」이라고 하는, 도쿠가와시대에 개역 또는 멸..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나가사키 26명 성인의 순교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나가사키 26명 성인의 순교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26명의 크리스트교도가 처형된 일에 의해, 오늘 2월 5일은“나가사키 26 성인 순교의 날”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일본의 달력으로 이 날은 게이쵸 원년 12월 19일 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력에 의거해 로마 교황청이 제정한 나가사키 순교일은 1597년 2월 5일이기에, 이 날짜로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이쵸 원년의 6월에 혜성이 나타나고, 7월에 아사마산에서 대분화가 일어나 그 재가 교토와 히데요시가 있는 후시미까지 이릅니다. 게다가 윤 7월(당시 일본의 역법으로는 7월이 두번이었습니다)에는 킨키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여진이 2주간이나 지속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8월에는 큰 태풍이 상륙..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