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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데와의 세키가하라, 하세도우 전투(1) 우에스기와 세키가하라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데와의 세키가하라, 하세도우 전투(1) 

우에스기와 세키가하라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은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이날 데와에서는 데와의 세키가하라 하세도우 전투가 있었습니다.


나오에 키네츠구는 에치고의 나가오 가문의 가신 히구치 켄토요(樋口兼豊)의 아들로 태어나 나오에 카게쓰나(直江景綱)의 딸과 결혼하며 데릴사위로 들어가 나오에 가문을 잇습니다. 그의 투구에는 크게 사랑 '애'자가 붙어있는데 그래서인지 평생 측실을 두지 않고 아내와 지냈다고 합니다. 오타테의 란(오타테의 란)에 승리한 뒤, 우에스기 겐신의 뒤를 이은 카게카츠를 모시게 됩니다. 카게카츠는 그에게 막대한 신뢰를 안고 있어, 이 세키가하라의 무렵에 키네츠구는 중신 중의 중신인 필두(筆頭)였습니다. 카게카츠가 가지는 120만석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되는 요네자와 30만석을 키네츠구에 맡기고 있는 것을 봐도, 그 신뢰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애'자가 새겨진 키네츠구의 투구




키네츠구는 아마 이시다 미쓰나리와도 관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쓰나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가지고 아이즈에 왔을 때, 두 명은 의기 투합해, 그 후도 교류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히데요시의 죽음 뒤에 오대로중 하나였던 카게카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안하무인격 태도에게 진저리가 나, 무츠 아이즈성에 돌아가 상경 명령을 거절하고 성곽의 수리나 무기의 구입, 식량의 비축 등, 영내의 정비에 힘을 썼습니다. 그 행동이, 이에야스의 대의명분이 됩니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에 모반의 혐의가 있다'며, 군세를 인솔해 아이즈 정발로 향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나이를 멀어지면 이시다 미쓰나리가 무엇인가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라고 하는 이에야스의 고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도요토미 가문을 파괴 하고 싶지만, 자신 쪽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모반이 되어 버리니까요. 키네츠구와 미쓰나리가 사이가 좋았기에, 이미 이 때, 미쓰나리와 우에스기의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진위는 모릅니다. 하지만 '반이에야스'의 관점이 일치하고 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가운데, 처음에는 카게카츠와 사이가 좋았던 이웃나라 데와의 야마가타성 성주 모가미 요시아키가 도쿠가와 측에 서서,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 참가하는 일을 천명합니다. 그 일을 안 카게카츠는 '이에야스의 대군이 오기 전에...'라고 하며, 키네츠구에 명해 모가미의 성인 하세도우성을 공격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없어진 후시미성을 미쓰나리가 공격한 것이 7월 19일(후시미성 공방전)입니다. 한편, 그 무렵 에도성에 있던 이에야스는, 7월 21일에 아이즈를 향해서 일단 에도성을 출발합니다만, 그 다음날에 후시미성 공격의 통지가 도착해 23일에는 아이즈 공격을 중지해, 요시아키 앞으로 '출진할 필요 없음'이라는 편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아직 모르는 키네츠구는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던 날에, 하세도우성의 포위를 완료합니다. 포위된 하세도우성에서는, 시무라 아키야스(志村光安)등이 농성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키네츠구의 우에스기군은 공성전 보다는 여시아키가 차례로 파견해 오는 원군과의 야전에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황도



일진일퇴를 반복하면서, 서로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하던 전투였지만, 9월이 끝나갈 무렵에,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의 패전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렇게 되자, 당연히 동군측인 모가미군의 사기는 높아집니다. 게다가, 세키가하라의 상황을 들은 오슈의 다테 마사무네도 모가미에 원군을 파견하기에 이르고, 10월 1일, 키네츠구는 부득이 군사를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 반달에 걸친 데와로의 전투는, 여기서 종결했습니다. 하지만 키네츠구에게는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우에스기 가문의 존망입니다. 미쓰나리편이었돈 키네츠구는 반 이에야스의 성격이 강해, 꽤 과격한 발언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하가 도쿠가와에 기운 이제 와서는, 그 일이 그에게 무겁게 눌러 옵니다. '이대로는, 우에스기가의 존속이 위험하다.' 라고 느낀 그는, 다음 해의 봄에 사죄를 위해 교토로 향합니다. 무사의 책임 지는 방법은, 본래 '죽어 사과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만,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죄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사는 일로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그의 생명을 건 교섭은, 이에야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유죄가 될 것이었던 카게카츠의 처분은 백지가 됩니다. 물론, 대폭적인 감봉은 있었지만 요네자와 30 만석이 남아, 우에스기가는 도쿠가와 체제의 아래, 요네자와번으로서 살아 남게 됩니다. 맹장으로서 이름을 달린 키네츠구는 그 다음은 싸움이 아니고, 영토의 경영에 솜씨를 발휘하는 일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