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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데와의 세키가하라, 하세도우 전투(2) 나오에 키네츠구의 계산실수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데와의 세키가하라, 하세도우 전투(2) 

나오에 키네츠구의 계산실수



 게이쵸5년(1600년) 9월 16일, 모가미령에 침공한 우에스기 가문의 참모 나오에키네츠구가 하세도우성(長谷堂城)에 총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하세도우성의 모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물이 된 아이즈의 영지는 한가운데에서 분단 된 형태인 단점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분명 120만석의 대 영지였지요. 하지만 모가미의 영지가 문제였습니다. 이야에스의 아이즈 정벌때 모가미가 동조하면 우에스기는 포위되기 때문입니다. 모가미의 영지를 점령하면, 그것이 해결되고 만약,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대승하고, 그 기세로 다시 아이즈 정벌을 재개했다고 해도, 후방의 숙적 모가미가 없으면, 협공 될 걱정도 없습니다.


9 월 13일 우에스기의 대군세를 앞에 두고, 불과 350명의 군사가 지키는 하타다니성에 요시아키는 성주 에구치 아키키요(江口光清)에 철퇴 명령을 내립니다만, 아키키요는 농성을 결행합니다. 거기서, 키네츠구가 성의 남쪽에 위치하는 카타쿠라산(片倉山)을 점거하고, 맞은편에 총포대를 배치해, 양쪽에서 동시 공격을 하자 금새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그 후도, 야치성(谷地城),사가에성(寒河江城), 시로이와성(白岩城)등을 차례차례로 점령해,모가미의 영지의 반은 우에스기의 것이 됩니다.



나오에 키네츠구의 하세도우 전투 개요도



 하세도우성은, 야마가타성의 남서 7 km에 위치하는 작은 언덕 위에 있어, 천헤의 요충지가 되고 있기에 모가미의 지성 중에서도, 가장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9월 15일 서쪽에서는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있던 그 날에, 하세도우성에 도착한 키네츠구는 성에서 1~2 km 멀어진 스가사와산(菅沢山)에 본진을 지었습니다. 그 수는, 약 1만 8000 이었습니다. 맞아 싸우는 하세도우성에는 성주인 시무라 아키야스(志村光安)가 이끄는 1,000명 뿐이었습니다.


 여기가 점령된다면, 야마가타성은 풍전 등화입니다. 요시아키는 아들 요시야스(義康)를 기타메성(北目城)에 파견해 다테 마사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토호쿠의 패권을 둘러싸고, 과거에는 싸워 온 모가미와 다테입니다. 하지만 마사무네의 어머니는, 요시아키의 여동생입니다. 게다가, 모가미가 쓰러진 후에는 우에스기는 다테의 영지로 침공할 것임이 틀림 없습니다. 이에야스의 입장으로도 모가미가 살아 남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회군으로 후원자를 잃은 마사무네는 점령한지 얼마 안된 시라이시성을 우에스기에 반환해, 화목을 묶은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마사무네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숙부인 루스 마사카게(留守政景)에 3,000의 군사를 붙여 야마가타에 파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게이쵸5년(1600년) 9월 16일, 하세도우성에 총공격을 개시하는 키네츠구였지만, 성문은 단단히 닫혀 철저 항전의 자세를 보여 우에스기 군은 용이하게 접근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날 밤에 이번은 모가미가 야습을 합니다. 이 때, 스가사와산 위에 진을 치고 있던 키네츠구의 주력 부대와는 다르게, 카스가 모토타다(春日元忠)는 그 산기슭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지형을 잘 아는 시무라 아키야스는 여기를 노립니다. 빈틈을 찔린 모토타다는 당황해서 산 위의 본진에 도망칩니다. 



하세도우 전투 그림



 그 후도 키네츠구는 연일 공격을 해 바깥 해자의 근처까지는 침공합니다만, 여기까지 오면 산상에서 총포의 집중 방화를 받고 고전에 고전을 거듭합니다. 이 결과에 초조해진 키네츠구는 장병에게, 주변의 논의 수확을 명해, 모가미를 도발합니다. 이것은 효과적인 작전 중 하나입니다.


 야마가타성에서 구원으로 온지 얼마 안된 사케노베 히데쯔나(鮭延秀綱)였습니다. 우선, 불과 100 정도의 인원으로, 도발당한 체를 하고, 성밖에 공격해 나옵니다.이에 우에스기세가 덮쳐 오면, 곧바로 군사를 물러, 오테몬(大手門) 근처로 유인합니다. 그곳에는 약 300정의 총포대를 잠복하게 해 두어, 쫓아온 우에스기 군세에 일제히 총탄을 퍼붓습니다. 이 작전에서, 30여명의 우에스기 군세가 목숨을 잃습니다만, 모가미 군세는 1명의 손실도 없이 무사하게 귀환합니다. 그 후도 연일의 공격에 모가미군은 어느 정도 타격을 받지만, 전황을 결정하지는 못하는 중에 24일에, 주위를 정찰하고 있던 한 부대가 적에게 조우해 그대로 전투에 들어 갔습니다. 이 일대에는 마에다 케이지로(前田慶次郎)나, 신영류(新影流)의 시조 카미즈미 노부쯔나(上泉信綱)의 손자의 카미즈미 야스쯔나(上泉泰綱)도 있었습니다만, 눈치챘을 때는 이미 절체절명이었습니다.



하세도우 전투 포진도입니다



 어떻게든 전선에서 10명의 적군을 죽일 무렵에 이 이야기를 들은 키네츠구는 당황해서 400의 군사를 현지로 향하게 합니다. 하지만 분전에도 불구하고 야스쯔나는 여기서 목숨을 잃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이때 다테의 원군도 도착해, 모가미의 사기는 더욱 더 높아집니다. 키네츠구는 다른 모가미의 지성과 같게, 이 하세도우성도 간단하게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대로 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9월 30일 우에스기에게 비보가 날아 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미쓰나리가 인솔하는 서군이 졌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 싸움에서 우에스기가 모가미에 이겼다고 해도, 천하가 이에야스의 것이 되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동요하는 병사들을 이제 물리려 합니다. 우에스기군은 1만 8000이라고 하는 대군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을 신속하게 철퇴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