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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8) 배신자의 보신, 사와산성 공격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8) 배신자의 보신, 사와산성 공격


게이쵸5년(1600년) 9월 17일, 그저께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배신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등 세력이 보신을 위해 사와산성(佐和山城)을 공격했습니다.



시와산성 전경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에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는 천하 판가르는 전투라고 하지만, 오후에는 거의 결착이 나 버렸습니다. 저녁, 전공의 확인을 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찾아 왔습니다. 히데아키의 배신에 의해, 단번에 전황이 이에야스 측에 유래해진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어느 의미로는 동군 승리의 제일 공로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신이 늦었던 일로, 이에야스가 초조 시켰던 것도 사실입니다.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의 앞에 나아가, 배신이 늦은 일을 사과하는 것과 동시에 '사와 산성 공격의 선봉을 맡고 싶습니다'라고 신청했습니다.


사와산성은 사실상 서군의 대장(명목상 총대장은 모리 데루모토였지만, 전투가 있던 이 날 오사카성에 있었습니다)인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성입니다. 세키가하라로에서 패주 한 미나리가, 무사 사냥의 그물을 빠져 나가고, 사와산성까지 도망칠 수 있는(직선 거리로 20 km 정도)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거성을 그대로 둘 수도 없었습니다. 히데아키의 그 말을 들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쿠츠키 모토쯔나(朽木元綱), 오가와 스게타다(小川祐忠)등이 앞다투어 자신도 선봉에 서겠다고 나옵니다.



시와산성의 위치와 세키가하라 전개



 그들은 모두 히데아키의 배신을 계기로, 서군에서 동군으로 붙은 인물들입니다. 여기서, 이에야스의 환심을 사, 나중에 동군에 참가한 불이익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려고 필사적입니다. 물론, 히데아키도 그럴 생각으로, 선봉을 신청한 것입니다. 군감의 이이 나오마사와 함께, 그들이 세키가하라를 출발한 것은 전투의 다음날 9월 16일이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7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1만 5천의 군세는, 두 패로 나누어져 단번에 사와산성에 쳐들어갔습니다. 이 때, 성을 지키고 있던 군사는 2천 8백이뿐이었습니다. 자군의 패배에 사기도 추락한데다 수의 차이까지 명백, 당연하게도 반나절 만에 산성은 거의 점령당해 버렸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초상화



 저녁에는, 미쓰나리의 형 마사즈미(正澄)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하고, 이에야스는 공격을 그만두게 합니다. 그런데 , 다음날인 18일의 이른 아침에,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의 군사가 천수각의 문을 파괴해, 단번에 성내에 쳐들어갔기 때문에, 천수각에 있던 미쓰나리의 아버지 마사츠구(正継), 그리고 형 마사즈미가 천수각에 불을 지르고, 일족 전원이 할복하 사와산성은 함락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와산성의 선봉을 선 일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보신은 성공한 것일까요? 아니, 집은 지켜졌을지도 모릅니다만, 본인의 마음에는, 무엇인가가 크게 눌려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불과 21세의 젊음으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