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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6) 쇼나이의 란과 쵸주인 모리아츠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6) 쇼나이의 란과 쵸주인 모리아츠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사츠마의 전국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사, 요시히로 형제의 '후토코로카나타(懐刀: 호신용 칼)'로 불린 쵸주인 모리아츠(長寿院盛淳)가 전사 했습니다.



후토코로카나타(懐刀)의 모습



오늘의 주역인 초주인 모리아츠에 대해 간단히 알아봅시다. 그는 원래 무로마치 막부에서 관령직을 대대로 계승하고, 오닌의 란의 발단이나 되는 상속자 분쟁이 있었던 하타케야마씨의 분가의 사람입니다. ,본명은 하타케야마 모리아츠(畠山盛敦)입니다. 조부의 대에 사츠마로 옮겨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리아츠 자신은 3세에 코노야마에서, 11세부터 쵸주인(長寿院)에서 공부한 승려로, 그 출가한 후의 이름이 쵸주인 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를 쵸주인 모리아츠라 합니다. 아들 타다히데(忠栄)가 출가해 아타 요시후사(阿多吉房)로 칭하고, 그 후의 자손들이 '아타'를 자칭하는 일로, 그도 아타 모리아츠, 혹은 아타 쵸주인 모리아츠라 부르기도 합니다. 승려의 지식을 충분하게 사용한 외교 교섭에 능했었던 것 같고, 그 재능을 평가한 시마즈 요시히사, 요시히로 형제에게 대발탁 되어 갑자기 군단의 요직을 맡았다고 합니다.



쵸주인 모리아츠



덴쇼 15년(1587년) 큐슈 정벌을 시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싸움에 진 시마즈 가문은 본래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을, 사츠마와 오스미의 영지가 남았던 것도 모리아츠의 외교술 덕입니다. 도요토미 정권하에 들어간 시마즈의 가신으로서 태합검지의 봉행을 역임해, 요시히사가 은거한 다음은 요시히로의 가로로서 활약하는 모리아츠였지만, 이 즈음에서 시마즈가에 내분이 일어납니다. 히데요시는, 진 시마즈를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시마즈 굴지의 용장 이쥬인 타다무네(伊集院忠棟)를 주군인 요시히사나 요시히로보다, 후대 하는 일로, 시마즈가의 약화를 꾀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용장으로 이름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책략에 의한 후대인지 실력에 수반하는 중용이었는가는 미묘하긴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히데요시의 수많은 우대조치에, 시마즈의 갈등은 심해집니다. 결국,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島津忠恒)가 게이쵸 2년(1597년), 이쥬인 타다무네를 후시미의 시마즈 저택에서 살해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는 모반을 도모하고 있었다'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모반은 시마즈측의 의견이고, 진실은 모릅니다. 이무튼, 이에 입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은, 타다무네의 아들 이쥬우인 타다자네(伊集院忠真)가 양휴유가 미야코성(都城)에 농성 해, 철저 항전 의 자세를 보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이쥬인 타다무네



 쇼나이의 란(庄内の乱)이라 불리는 이 반란은 결국 게이쵸 5년(1600년)의 3월에 진압됩니다만, 이 미야코성이 12개의 지성을 가지는 견고한 성이었기에, 용이하게 공락하지 못하고 시마즈 가문은 여기에 상당한 인원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 게이쵸5년은 바로 세키가하라가 있던 해입니다. 이 내란을 때문에,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에 많은 군사를 데려 갈 수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요시히로 일행은 원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으로 참전하기 위해서, 최초로 향한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의 부재중 성을 맡는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에 입성을 거절 당해, 어쩔 수 없이 서군으로 세키가하라에 참전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사츠마에서 들은 모리아츠는 '주군이 위급하다!'이라며, 7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 말을 몰아, 세키가하라로 달려 갑니다. 어떻게든 세키가하라의 개전전에 시간이 맞은 모리아츠를 마중나간 요시히로는 기쁜 나머지 손을 잡고 진바오리(陣羽織)를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시마즈가의 진바오리(재현)



 이렇게 해서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이른 아침 세키가하라 전투의 막이 열립니다. 원래 서군으로 참전할 것이 아니었던 요시히로는 싸움이 시작되어도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재삼의 요청도 무시해 움직이지 않는 시마즈대 부였지만, 금새 서군의 대패가 결정적으로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서군으로 참가한 전투에서, 적인 동군에 항복하기에는 시마즈의 자긍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한때 할복을 각오하는 요시히로에, 조카 시마즈 토요히사(島津豊久)가 극구 말립니다. 여기서 전선 이탈을 진언 한 것이, 모리아츠입니다. 게다가, 일부러 도쿠가와 측의 앞을 돌파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마즈의 배진(島津の背進)입니다.


 이 때, 모리아츠는 '사츠마까지의 5백리, 주군을 지켜 훌륭히 전사 해, 그 이름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라고, 병사들에게 역설해 달려나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돌격은 예상대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아군은 차례차례로 전사 해, 남은 군사도 부상으로 쓰러져 가는 가운데 토요히사가 전사 하면, 모리아츠도 그 뒤를 잇습니다. 그래, 전투전에 주군에게 받은 진바오리를 입은 모리아츠는 '내가, 시마즈 요시히로이다!'라고 자청해 적의 주의를 모읍니다. 명장의 목을 들려고 모이는 적군의 한 명, 야마모토 요시즈미(山本義純)의 손에 의해서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결국 요시히로는 훌륭히 전선 이탈에 성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