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5) 시마 사콘, 전사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5) 시마 사콘, 전사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죽은 시마 사콘(島左近)은 서군의 주요인물이면서, 오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목이 발견되지 않은 인물입니다. 요시쓰구의 목에 대해서는 유아사 고스케와 도도 다카노리의 일화가 있습니다만, 사콘에는 그런 일화도 없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시마 사콘과 직접 대결한 쿠로다 부대 병사의 회고록 「후루사토이야기古郷物語」에도, '그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 몸의 털이 곤두섰다'라고 썼듯이, '귀신 사콘(鬼左近)'의 이명에 어울리는 맹장은 에도시대가 되어도, 쿠로다의 가신들의 이야깃거리로 남았습니다. '밀려 드는 대군에 녹아들어 자취을 감추었다', '깊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창을 휘두르며 분전 해, 장렬히 전사했다.'라고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온전히 보지 못해, 아무도 그 최후를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귀신도 때려잡는 시마 사콘!



 그 정도의 무장이 죽은 것을 확인으로 하지 않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신초코기(信長公記)」에서는 행방 불명, 「세키가하라 군키모노(関ヶ原軍記)」에서는 서쪽지방에 은거했다고 하며,「세키가하라 마을 역사(関ヶ原町史)」에서는 교토의 절에 숨어서, 이 앞 32년간이나 생존하고 있었 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콘 정도의 맹장이 살아 있었다면 오사카의 진에게 참전하지 않을 것은 없기 때문에, 역시 이 세키가하라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시마 사콘, 그의 이름은 카츠타케(勝猛)하고도 하고, 키요오키(清興)라고도 합니다. 이름에서 부터, 그 전반생이 수수께끼에 싸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출신은, 오미, 오와리, 대마도 등 다양합니다만, 현재는, 다이와 동부의 헤구리(平群)군의 쿠니진으로, 츠츠이씨의 가로인 시마 가문의 사람이라고 하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쓰시마에 있는 사콘의 묘



 코후쿠지(興福寺)의 다몬인 에이슌(多聞院英俊)의 「다문원일기(多聞院日記)」에는, 에이로쿠10년(1567년)에, 그 헤구리의 성에서, 25세의 아들이 친아버지인 성주나 양모 등, 일족 9명을 살해하고 당주가 된 이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가 사콘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시마 사콘의 이름으로, 역사상에 등장하는 것은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의 가로인 마츠쿠라 우콘 시게노부(松倉右近重信) 이라는 무장과 함께, '츠츠이의 우콘 사콘(筒井の右近左近)'이라고 칭해지게 되고 나서 입니다. 그러나, 덴쇼 12년(1584년)에 주군 준케이가 병사해, 그 후를 이은 아들 사다쯔구(定次)가 술에 빠진 실망스런 주군이기 때문에 대립이 생겨 이윽고 츠츠이 가문이 균열이 생겨,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에게로 가서, 도요토미 히데나가(秀長), 히데야스(秀保) 부자를 시중들고, 조선 침략때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이와 도요토미(大和豊臣) 가문이 개역이 되어, 시마사콘은 료닌(방랑무사)로서 불우한 나날을 보내, 출가도 생각하는 나날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다가옵니다.


 당시 오미 미구치성(水口城) 성주였던 미쓰나리는 스스로의 사콘에게 가서 4만석의 반인 2만석을 주모 '꼭 나의 가신이 되어 주게.'라고, 사콘에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사콘이 미쓰나리의 가신이 된 것은 그가 19 만석의 다이묘가 되어, 사와산성의 성주가 되고 나서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어 창작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만큼 사콘을 갖고 싶었다라고 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만약, 미쓰나리가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하는 타입이 아니고, 내정으로 출세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무공을 보충해 주는 맹장으로 이름 높은 사콘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사콘은 사콘대로 주군으로 삼을만한 지장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三成に 過ぎたるものが二つあり

미쓰나리에게는 지나친 것이 두개 있네

島の左近と佐和山の城

시마의 사콘과 사와산성이라네



 미쓰나리에게 있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1명입니다. 히데요시가 죽은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그의 지위가 흔들리는 중, 사콘은 많은 활약을 하게 됩니다. 우선, 우에스기의 태도에 격노해 아이즈 정벌로 향하는 이에야스를 암살하도록, 미쓰나리에개 진언 합니다. 도리를 존중해 망설이는 미쓰나리에게 사콘은 '수단을 선택하고 있으면, 목적은 달성할 수 없습니다.' 라고, 설득을 거듭해 결국 설득합니다. 이렇게 해서, 토호쿠에 간 이에야스를 이시베 숙소(石部宿)에서 매복해, 야습을 할 수 있도록 800의 군사를 준비합니다.



도쿠가와의 위기, 이시베 숙소



 오봉행의 1명인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와 그가 함께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사전에 새어 이에야스가 알게 되어, 아이즈로 출발을 앞당겨 미수로 끝나 버립니다. 사콘은 많이 분해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사콘은 쿠제가와 전투에서 승리해 사기가 오릅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오전 8 시경에 이이 나오미사 부대의 발포에 의해서 개시된 전투에서 우선, 선두에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가 부딪치는 중에, 개전에서 1시간 되었을 무렵, 사콘은, 100명에 못 미친 정도의 군세로 본진인 사사오산에서 돌격해 나갑니다. 상대는 쿠로다 나가마사 부대였습니다. 장병을 교묘하게 운용하고, 귀신과 같이 달려드는 사콘의 모습은 쿠로다 부대를 번농시켜, 차츰 쿠로다 부대의 사기는 내료 갑니다. 그러나, 쿠로다 부대도, 정면에서는 맹장 사콘을 죽이는 일은 불가능이라고 생각해, 이미 총포대를 우회 시켜, 위험한 순간에 총을 발사합니다.



쿠로다 나가마사의 총포대피격당한 시마 사콘





 혼전 중에, 말등에 있던 사콘은 조준사격을 해 중상을 입어 버립니다. 이 쿠로다 부대의 측면공격은 사콘 뿐만이 아니라, 이시다 부대를 비롯한 서군에 크고 깊은 상처를 입게 했습니다. 일단, 목책 안으로 돌아온 사콘은 지혈도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말을 타고 나와서 적에게 돌격해 나가,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후에, 사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그는 창작된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을 앞에두고 부상당한 채로 뛰어나간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