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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2) 전야, 히데아키는 무엇을 생각하나?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2)
전야, 히데아키는 무엇을 생각하나?




게이쵸5년(1600년) 9월 14일 드디어,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전날입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4일, 아침 일찍 기후성을 나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오를 넘겨 아카사카성(赤坂城)에서 미노 오카야마에 도착해, 여기를 동군의 본영으로하고 진을 쳤습니다. 조속히 열린 군의의 자리에서, '적의 본영인 오카이성에는 조금의 군세를 향하게 하고, 주력은 사와산성을 공격해 그 기세로 오사카성으로 진군한다.'라는 방침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본심은 세키가하라에서 결착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동군의 이 작전이 서군에게 흘러간다면 미쓰나리가 오카이성에서 공격해 나올 것을 예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오카이성에서 미쓰나리가 농성 작전을 펼치면, 먼저 오카이성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쿠제카와 전투(쿠제카와 전투) 후,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하기로 합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4일 오후 7시 미쓰나리는 오카이성의 방비로 사위 후쿠하라 나가요시(福原長堯)에게 7천 5백의 군사를 맡기고, 나머지 4만의 전군을 인솔하고, 운명의 세키가하라로 향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초상화



 서군은 오카이에서 세키가하라까지, 약 16 km의 밤길을 행군했습니다. 이 날은, 밤 늦게 비가 내려, 비에 젖은 가도를 행군 하는 중, 미쓰나리는 도중에 부대를 떠나 나가츠 마사이에(長束正家),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등, 동쪽을 맡은 부대와 전투의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 마츠오산(松尾山)에 진을 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전령을 보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원래 이날, 오카이성의 군의에 출석했어야 했지만 왠지 오카이성에는 오지 않고 그대로 마츠오산으로 향해 버렸습니다. 이에 미쓰나리는 불안을 안은 것입니다. 그는 히데아키에게 미쓰나리, 오오타니 요시쓰구 등 서군 주요 멤버의 서명이 들어간 서약서를 보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지닌 1만 5천의 군세는 동군, 서군 어느 쪽에 있어서도 매력적입니다. 히데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마사(木下家定)의 아들로, 아이의 없는 네네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도 그를 자신의 아이와 같이 귀여워해, 한때는 자신의 후계자라고 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은 일로 그의 운명은 크게 바뀝니다. 13세 때, 리가의 분가인 코바야카와가에 양자로 보내져, 다음해 치쿠젠, 치쿠고 32만석을 상속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대패해 에츠젠, 키타노쇼에 좌천 되어 버렸습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다시 치쿠젠, 치쿠고의 영주로 돌아옵니다만, 실은 이것은, 당시 오대로의 한 사람인 이에야스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즉, 히데아키에게 히데요리는 원망의 대상이며 은의를 느낄 이유도 없고, 오히려 은의를 느낀다면 이에야스와 그의 편인 의모였던 네네에게서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군의 총대장 리 가문의 분가 코바야카와 가문의 당주입니다.



히데아키가 전장에서 입었던 옷



 미쓰나리가 보낸 서약서에는 '히데요리가 15세가 될 때까지, 관백의 자리를 양보한다.'라고 쓰여져 있었고, 관백이 되면 교토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비용으로 '하리마 일국을 준다'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중신 이나바 마사나리(稲葉正成)와 히라오카 요리카츠(平岡頼勝)에게는 '각 각 오미 10만석을 준다', 그리고 군자금으로 '황금 300매를 준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나바와 히라오카앞에는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의 서명에 있는 동군의 서약서도 와 있었습니다. 동군으로부터의 서약서에는 '서군의 일원으로 후시미성 공방전에 참가한 일은 일체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과 '세키가하라에서의 행동에 따라서 기나이의 2국을 준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아직도 19세인 소년 무장에게는 너무 무거운 천하의 판세를 읽어야 하는 결단입니다. 결국 그는 서군에는'봉화를 신호로 마츠오산을 물러나 전투에 참가한다.'라고 약속했습니다. 한편, 동군에는, '기회를 봐 서군을 배반해, 동군 측에 참가해 싸운다'라고 했습니다. 원래 그는 후시미성 공격의 뒤 병을 핑계로 오미에 틀어박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미쓰나리가 출병요청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출병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고민하는 동안에 미쓰나리 부대를 시작으로 서군의 주력 부대는 세키가하라에 잇달아 도착합니다. 이야에스를 도망치기 못하게 하려고 서북쪽에 진을 쳐, 홋코쿠가도와 나카센도우를 봉쇄한 것은 오전 1시경이었습니다.



세키가하라 포진도



 미쓰나리는 히데아키에게 전령을 보낸 뒤, 야마나카 마을에 진을 친 오오타니 요시쓰구를 방문해 최종 협의를 끝내고  자신은 홋코쿠 가도를 내려다 보는 사사오산(笹尾山)에 진을 쳤습니다. 한편, 이에야스는 '서군이 세키가하라로 향해 이동중'의 소식을 오전 2 시경에 듣게 됩니다. 그는 조속히, 전군에 출진 명령을 내립니다. 선봉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와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그 뒤을이어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한층 뒤에는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가 맡게 됩니다. 마쓰다이라 타다요시는 이에야스의 사남으로, 실은 이 자리는,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히데타다의 자리였지만, 그는 우에다성에서 발이 묶여 늦어버렸습니다. 이윽고, 오전 4 시경 서군의 포진이 완료되었습니다. 1시간 늦은 오전 5 시경, 세키가하라에 도착한 동군은 오전 6시에 포진을 완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