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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큐슈의 세키가하라, 이시가키바루 전투(2) 오오토모 요시무네의 야망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큐슈의 세키가하라, 이시가키바루 전투(2) 

오오토모 요시무네의 야망


 


 게이쵸5년(1600년) 9월 13일,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앞두고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기운을 타 재흥을 꿈꾸는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와 그것을 맞아 싸우는 쿠로다 죠수이(黒田如水)의 이시가키바루 전투(石垣原の合戦)가 있었습니다.



오오토모 요시무네 초상화



7월 19일에 발발한 후시미성 공방전(후시미성 공방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솔하는 동군의 선발대는 서쪽으로 향해 기후성을 공략(기후성 공방전)합니다. 한편 이시다 미쓰나리가 인솔하는 서군은, 아노쓰성(아노쓰성 공방전), 마츠자카성을 공략합니다. 그리고 동군으로 배신한 쿄고쿠 다카쓰구의 오츠성을 공격하면서(오츠성 공방전), 타나베성을 공격합니다.(타나베성 공방전호쿠리쿠에서는, 이에야스 측의 마에다 토시나가 미쓰나리 측의 니와 나가시게가 아사이나와테에서 싸우고(아사이나와테 전투), 시나노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인솔하는 동군의 별동대가, 우에다성에서 농성하는 사나다 마사유키, 유키무라 부자를 공격중이었습니다.(우에다성 공방전)


이런 대규모 전투의 전후에, 그 혼합을 틈타 가문을 재흥시키거나, 옛 영토 탈환을 목표로 해 군사를 일으키는 몰락 영주도 많이 나타납니다. 오오토모 요시무네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큐슈에 이름을 떨치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의 아들입니다. 오오토모 가문은 아들에게 당주직을 물려주고 크리스천의 왕국 무지카를 세우려 벌인 미미가와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에게 진 것을 계기로, 몰락해 갑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을 도와 어떻게든 분고 일국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린의 뒤를 이은 요시무네가 임진왜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고 점령한 성을 방폐한 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무렵은 영지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원래, 이 때의 그는 료닌(방랑무사)이기 때문에, 동군에 붙든지 서군에 붙든지 자유였습니다. 실제로, 죠수이나 가토 기요마사는 그에게 동군에 참전하도록 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시무네는 굳이 서군으로 죠수이와 적대하는 일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히데요시로부터의 개역의 명령을 받은 직후에, 스오우에 있던 인연때문인지 친분이 있었던 모리 데루모토에게 강하게 권해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분고에 귀국 즈음에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로부터, 구족(具足: 갑주) 100령, 장병창(長柄槍) 100개, 총 300정, 은 100매, 말 100마리를 선물로서 받고, 승리할 때에는 분고 일국을 복령 할 약속도 얻어 내고 있습니다. 총대장의 권유이 도요토미가의 백업이 있었다면 그가 의욕이 생긴 것도 알 것 같습니다. 분고로 향하던 요시무네는 여행의 도중 , 옛 신하인 요시히로 무네유키(吉弘統幸)와 재회합니다. 무네유키은 오오토모 대대로의 중신으로, 타치바나 도셋츠(立花道雪)와 함께 오오토모가를 지탱했으며, 이와야성(岩屋城)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은 나막신 다카하시 소운(高橋紹運)의 조카입니다. 요시무네가 개역하게 되었을 때부터, 소운의 아들인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의 야나가와성(柳川城)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즈음 불온한 공기를 느껴, 요시무네의 아들 요시노리(義乗)를 보좌하려고, 큐슈에서 에도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무네유키는 요시무네에 게 동군으로 참전할 것을 호소합니다만, 이미 서군으로 참전할 결의가 단단한 의요시무네는 그 말을 듣지 읺았습니다. 분고로 돌아온 요시무네의 아래에서는, 옛 신하를 포함해 눈 깜짝할 사이에 2,000 정도의 군사가 모입니다.


 조속히, 요시무네는 모인 군사를 인솔해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부재한 키즈키성(杵築城)을 포위합니다.  그 일을 우연히 들은 죠수이가 구원으로 달려 드는 일을 알자 일단 요시무네는 키즈키성의 포위를 풀고, 타테이시(立石)로 돌아와 맞아 싸울 수 있도록 태세를 정돈합니다. 이렇게 해서 게이쵸5년(1600년) 9월 13일, 오오토모군과 쿠로다, 호소카와 연합군은 이시가키바루(石垣原)에서 대진하게 됩니다. 그 날의 저녁 쿠로다군의 선봉대가 도착한 키즈키성에서는 성을 맡고 있던 호소카와가의 가신 마츠이 야스유키(松井康之), 아리요 다테유키(有吉立行)와 함께 이시가키바루로 출진했습니다. 한편 오오토모군은, 다카가와(境川)의 남쪽에 쌓아 올려진 타테이시성채(立石砦)를 거점으로 포진 합니다.



당시 전황도


 

 호소카와군, 약 200의 쿠로다군, 약 2000을 더한 연합군에 약 900의 오오토모군은 대치를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그 날의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우선, 오오토모군의 총포대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합니다. 그것에 쿠로다 군의 선봉대 히사노 지자에몬(久野次左衛門)이 돌격 해, 계속해 지소우지산(実相寺山)에 포진하고 있던 마츠이 야스유키(松井康之)도 돌격 합니다. 그러나, 격렬한 총포대의 공격에 지자에몬이 전사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히사노 부대가 일단 후퇴하지만, 마츠이 부대는 계속 견딥니다. 결국, 이노우에 유키후사(井上之房)가 야스유키를 설득해, 간신히 후퇴합니다. 그것을 기회로 삼아, 오오토모 군의 선봉인 요시히로 무네유키와 무나카타 시게쯔구(宗像鎮続)가 앞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오토모 군이 우세하게됩니다. 한때는, 연합군을 지츠소우지산의 산기슭에까지 추적합니다만, 적군이 수가 더 많은 것과, 피로가 누적되어 오오토모군은 잠시 지체합니다. 연합군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재빠르게 요시히로 부대와 무나카타 부대를 겨냥하고 공격을 시작 합니다.


단번에 형세가 역전이 되어, 아군의 열세를 본 요시무네는 퇴각을 명합니다만, 무네유키는 명령을 듣지 않고, 더욱 더 분전합니다. 양군이 혼잡한 와중에, 우연히 유쿠후사(之房)와 무네유키의 일기토가 벌어집니다. 무용으로 이름 높은 무네유키였습니다만, 이 일기토에서는 유쿠후사가 이겼습니다. 게다가 이 후, 시게쯔구마저 전사 해 버려, 오오토모군의 사기는 단번에 내려가 버렸습니다. 오후 6 시경에는, 오오토모군의 패색이 짙어 지는 중, 남하해 온 쿠로아 죠수이의 본대가 지츠소우지산의 산기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요시무네는 타테이시성채(立石砦)에 농성합니다. 다음낳인 14일부터, '이대로 단번에 오오토모를 전멸 시켜야 한다'라는 가신의 의견에, '오오토모에게는 사적인 원한은 없는데, 요시무네를 죽이는 것은, 좀...'이라고, 죠수이가 주저 하고 있는데, 요시무네가 부하 타하라 쇼우인(田原紹忍)을 통해서, 쿠로다의 부하인 모리 토모노부(母里友信)에게 항복을 신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시가키바루 전투는 종결됩니다. 기이하게도, 그 날은, 그 세키가하라에서 전투를 한 9월 15일이었지만, 당연, 큐슈에 있는 누구라도, 그 천하를 판가른 싸움의 승패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