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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 말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이치노타니 전투(3) 아오바의 피리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진 것이 '이..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2) 타이라노 타다노리 전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2) 타이라노 타다노리 전사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이치노타니 전투(1) 히요도리고 절벽 기습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이치노타니 전투(1) 히요도리고 절벽 기습 칸랴쿠 3년(1184년) 2월 7일은, 겐페이 전투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이치노타니(一の谷) 전투'가 있던 날입니다. 작년인 칸랴쿠 2년(1183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군한 키소노 요시나카의 군사에 경을 쫓겨 서해로 교토를 빠져나간 타이라 가문이었습니다.(교토 탈출)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나카의 대립으로 겐지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동안에, 야시마(屋島)에서 조금 돌아와 일찍이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한때 수도로 정했던 후쿠하라(福原)에 있었습니다. 미나모토 가문 내부의 갈등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가 죽으며 끝나는 듯 했습니다.(아와즈 전투) 이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표는 다름아닌 타이라 가문입니다. 이에 벌어진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6) 아와즈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6) 아와즈 전투 칸랴쿠 3년(1184년) 1월 21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명령을 받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와 전투한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비와호 부근인 아와즈에서 패배해 전사했습니다. 17일 노도와 같이 우지가와를 넘어 온 요시츠네군에 요시나카군은 밀리기만 합니다. 때마침, 반목 하고 있던 숙부 유키이에(行家)를 토벌하기 위해, 젖형제 히구치 지로우(樋口次郎)에게 군사를 붙여 배웅했던 직후로 요시나카군은 허술했습니다. 몇 만이라고 하는 가마쿠라에서 온 요리토모의 대군에, 몇 안 되는 수세의 요시나카군이 맞겨룰 수 있을 리도 없습니다. 요시나카 군은 서서히 후퇴합니다. 반면 요시츠네군은 고세를 점령하고 방비를 시작해 로크죠가와라(六条河原)의..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5) 우지가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5) 우지가와 전투 칸랴쿠 3년(1184년) 1월 16일, 오미에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에게 동국에서 대군이 파견되서 교토로 진군해 우지가와 맞은 편에 진을 쳤습니다. 요시나카의 도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고시라카와 법황이었지만, 키소 태생으로 교토의 관례를 모르고 무례한 행동을 한 요시나카를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는 은밀히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부르고 요시나카에게 '타이라 추토의 선지'를 내립니다. 물론, '타이라 가문이 수도를 탈환하러 온다'는 소문이 퍼진것도 한 이유였습니다. 요시나카는 책략에는 능하지 않은 인물이여서, 수면 아래의 공작을 눈치채지 못하고 타이라 토벌을 위해 출발합니다.(미즈시마 전투) 여기서 패배한 키소노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요시나카 토벌을 개시하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요시나카 토벌을 개시하다 칸랴쿠 3년(1184년) 1월 16일, 오미에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에게 동국에서 대군이 파견되어 왔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그대로 여세를 몰아 호쿠리쿠를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쇼군에 오르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키소노 요시나카 쇼군에 오르다 칸랴쿠 원년(1184년) 1월 11일, 키소(미나모토)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쇼군에 올랐습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쇼군'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입니다. '정이'라고 하는 것은 에조(蝦夷)를 정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정규적으로 있는 직책이 아니라, 정벌을 위해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직책입니다. 이 직책은 '정벌'이 목적이기에 무가들을 이끄는 병권을 틀어쥔 직책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 당분간 공백이었던 이 자리는 여기서 '무사의 동량(武士の棟梁)'의 명칭으로 '쇼군'의 이름이 부활하게 됩니다. 불과 십년 뿐이기는 했지만 키소노 요리카는 쇼군에 올라 '사마노카미 겐이요노카미 오사히쇼군 미나모토노 요시나카(左馬頭兼伊予守朝日将軍源義仲)를..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고시라카와 덴노의 호주지덴 방화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키소노 요시나카, 고시라카와 덴노의 호주지덴 방화 지에이 2년(1183년) 11월 18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고세 호주지덴(法住寺殿)에 방화해,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유폐 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4) 미즈시마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4) 미즈시마 전투 지에이 2년(1183년) 윤 10월 1일, 서쪽 지방으로 도망친 타이라와 그 추토를 명령받은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싸운 미즈시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그대로 여..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교토에 들어가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키소노 요시나카, 교토에 들어가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 28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수도에 들어가, 동시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타이라 추토의 선지(平家追討の院宣)'를 내렸습니다. 호쿠리쿠에서 타이라군에 대승리한(구리가타토우케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호쿠리쿠에서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당히 교토에 들어간 것은, 타이라가문이 교토에서 탈출한(타이라 가문 교토를 떠나다) 뒤로 3일 후인 7월 28일의 일이었습니다. 호쿠리쿠군을 한번 보려고 울타리를 쌓아 올린 사람들은, 새로운 교토를 만들 그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타이라 가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표되듯이,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타이라 가문이 밀려나고 무엇인가 바뀐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