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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 말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5) 키메가사성 공방전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5) 키메가사성 공방전 지쇼4년(1180년) 8월 27일, 키메가사성(衣笠城) 공방전에서, 성을 점령당한 미우라의 당주 미우라 요시아키(三浦義明)가 전사 했습니다.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 져 유배당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요인은 '귀족화된 타이라 가문에 대해, 반도우(坂東) 타이라라 불리는 관동의 무사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라던가, '타이라 가문 중심의 압정에 지방 무사들의 불만이 정점으로 달했다.' 라던가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일련의 겐페이 전투를 보면, 마나모토의 후계자에게 붙은 동국의 무사들이, 멸망해 가는 타이라 가문에 압승한 것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별로 승산이 없는 가운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4) 이시바시산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4) 이시바시산 전투 지쇼 4년(1180년) 8월 23일, 이시바시산(石橋山)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타이라 가문의 오오바노 가게치카(大庭景親)가 격돌했습니다.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져 아버지 요시토모(義朝)를 잃은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3세 때였습니다. 그도 이 싸움에는 출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잡힌 이상 맏형 요시히라(義平)와 같이 목이 베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대장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어머니 이케노젠니(池禅尼)가 잃은 아들과 얼굴 생김새가 비슷한 요리모토를 '어떻게든 생명만은 살려 주면 안 되겠니'라며 키요모리에게 신신 당부해 목숨을 보전해 이즈로 유폐됩니다. 그곳에서 힘을 기른 그는 모치히토왕이 쓴 영지를 받고(모치히토왕 영지..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사를 일으키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사를 일으키다 지쇼4년(1180년) 8월 17일, 이즈에 유폐 되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 져 아버지 요시토모(義朝)를 잃은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3세 때였습니다. 그도 이 싸움에는 출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잡힌 이상 맏형 요시히라(義平)와 같이 목이 베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대장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어머니 이케노젠니(池禅尼)가 잃은 아들과 얼굴 생김새가 비슷한 요리모토를 '어떻게든 생명만은 살려 주면 안 되겠니'라며 키요모리에게 신신 당부해 목숨을 보전해 이즈로 유폐됩니다. 그 이래로 군사를 일으키는 이 지쇼4년(1180년)까지의 20년간, 그는 하루..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2) 우지바시 전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2) 우지바시 전투 지쇼4년(1180년) 5월 26일, 겐페이 전투의 개막 우지바시 전투(宇治橋合戦)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 진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는 뵤됴인(平等院)에서 할복 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 '시시가타니 음모(시시가타니 음모)'로 불리는 '반 타이라'의 싹을 사전에 자른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는 이윽고, 딸 토쿠코가 낳은 아이를 불과 3세에 안토쿠덴노(安徳天皇)로 즉위시켜, 타이라 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절정기일수록 '타도 타이라'의 세력도 높아집니다. 이윽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로, 계승권은 훨씬 위에 있지만 번번히 밀린 모치히토왕(以仁王)과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가 접촉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이라 토벌의..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 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 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지쇼4년(1180년) 4월 9일,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3 황태자 모치히토왕이 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했습니다. 헤이지 원년(1159년)의 12월에 발발한 헤이지의 란은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대승리로 끝났습니다. 적의 손에 떨어지고 있던 니죠 천황과 후 시라카와 법황을 구조해 낸 일로 신망을 얻은 타이라 가문은 일본의 패자가 됩니다. 8년 뒤 닌안 2년(1167년)에는 50세로, 태정관까지 오른 키요모리(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이때의 타이라 가문은 공경 16명, 4~5품 이상의 당상관 30명 등 에다가, 일본의 거의 절반의 수령, 궁중 경비, 제사까지 맡는 전대미문의 영화를 누려, '타이라 가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 하고..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쟁란의 시작, 지쇼 삼년의 정변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쟁란의 시작, 지쇼 삼년의 정변 지쇼 3년(1179년) 11월 17일,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가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의 신하를 관백 이하 공경 39명을 해임해 '지쇼 3년의 정변(治承三年の政変)'을 결행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에 발각된 시시가타니의 음모(시시가타니의 음모)에서 '반 타이라 가문'의 기치를 올리지만, 현실을 모른채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다 실패해 버립니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은 주모자 중 한명이었으나 훌륭히 살아남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상부상조로 서로를 돕던 고시라카와 법황과 타이라노 키요모리 사이에 큰 도랑이 생겼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음 해 11월에 키요모리의 딸인 토쿠코(徳子)가 사내 아이를 출산합니다. 토쿠코는 당대의..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시시가타니의 음모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시시가타니의 음모 지쇼 원년(1177년) 5월 29일, 타카히로(俊寛)의 산장에서 행해지고 있던 타이라 가문 타도 집회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출석해 후에 '시시가타니의 음모'라고 칭해지는 회합이 열렸습니다. 원래 닌안2년(1167년)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급작스런 승진으로 태정관으로 취임(키요모리의 태정관 취임) 하고 나서는 그 힘은 더욱 커져, 교토에서는 머리카락을 짧게 잘르고, 붉은 줄을 드리운 '카부로(禿童)'라고 불리는 15~16세의 소년들 300명 정도가 돌아다니며 타이라 가문에 반발하는 사람이나 욕을 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토 도처를 걸어 다니며, 반발하는 사람을 찾아내서 저택에 침입해 재산을 몰수하고 욕한 본인을 잡아 로쿠하라(六波羅)에 인도한..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할복, 류구왕 전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미나모토노 다메토모 할복, 류구왕 전설 닌안 2년(1170년) 3월 6일, 호겐의 난에 깨지고 이즈오오시마에 흘러가고 있던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할복 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첫 할복 자살이라고 합니다. 덴노가문의 황위와 권력을 둘러싼 분쟁에 후지와라, 타이라, 미나모토 가문도 갈려서 싸우게 됩니다. 이 호겐의 난(호겐의 난)에서 야습을 결행한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3,000이나 되는 군세에 대항하는 스토쿠 덴노 세력은 고작 200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스토쿠덴노 측에서 분전한 맹장이 바로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아버지에게 의절되어 큐슈에 유배당했습니다. 그런데, 큐슈에서 자신의 땅을 지배하던 호족들을 토벌한 맹장입니다. 그의 힘을 무서워한 조정이 아버..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연표; 헤이안 시대 후기, 겐페이 쟁란의 연표 일본 헤이안시대 연표;헤이안 시대 후기, 겐페이 쟁란의 연표 헤이안 시대 말기, 혼란이 찾아와 무사들이 힘을 얻고 일본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겐페이 쟁란(源平争乱)이 있었습니다. 연호 년도 일자 사건 호겐 1156년 7월 2일 토바덴노 사망 7월 11일 호겐의 난 발발 헤이지 1159년 12월 9일 헤이지의 난 발발 12월 26일 헤이지의 난 종결 1160년 1월 4일 미나모토노 요시모토가 욕실에서 암살당하다 쵸칸 1164년 8월 26일 스도쿠덴노 사망, 최악의 원령전설 닌안 1167년 2월 11일 타이라노 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3월 6일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할복, 류구왕 전설 지쇼 1177년 5월 29일 시시가타니의 음모 1179년 3월 2일 겐페이 쟁란의 개막, 지쇼 삼년의 정변 1180..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