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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교토에 들어가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교토에 들어가



 주에이 2년(1183년) 7월 28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수도에 들어가, 동시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타이라 토의 선지(平家追討の院宣)'를 내렸습니다.



키소(미나모토)노 요시나카



 호쿠리쿠에서 타이라군에 대승리한(구리가타토우케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호쿠리쿠에서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당히 교토에 들어간 것은, 타이라가문이 교토에서 탈출한(타이라 가문 교토를 떠나) 뒤로 3일 후인 7월 28일의 일이었습니다. 호쿠리쿠군을 한번 보려고 울타리를 쌓아 올린 사람들은, 새로운 교토를 만들 그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타이라 가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로 대표되듯이,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타이라 가문이 밀려나고 무엇인가 바뀐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시나카군은 훌륭하게 기대를 배반했습니다. 그들은 민가를 약탈하고 말리는 사람은 폭행했으며 간신히 수확때가 온 벼를 베서, 말의 먹이로 했습니다. '이정도라면 아직 타이라 가문이 있었을 무렵이 좋았다!'라고 하는 사람도 나왔습니다. 호쿠리쿠의 병사들의 평판이 나쁜 것은 곧 요시나카의 평판으로 직결됩니다. '우마차를 타는 방법도 알지 못해, 차 에서 흔들거리는 일을 큰 소리로 계속 고함쳤다'던가 , '공가에 대해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던가, 「타이라 가문 이야기(平家物語)」도 「겐페이 성쇠기(源平盛衰記)」에도 입을 모아 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기록은 승자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과연 요시나카군이 정말 이런 일을 저질렀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호쿠리쿠의 무사들은 교토의 화려한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토는 이미 쇠락해 그들이 기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게다가 교통의 문화는 호쿠리쿠와 다른 것으로, 그들은 적응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키소노 요리나카는 책략과는 거리가 먼, 전투에만 집중하던 무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발기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책략가였습니다. 그는 급히 고시라카와 법황과 접촉합니다. 정치적 식견이 없어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요시나카에게 골치를 썩이던 고시라카와 법황은 '타이라 추토의 선지'를 내려 교토에서 쫓아낸 뒤에 요리토모에게 상경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때가 아니라고 본 요리토모는 킨키 지방의 기근을 핑계로 상경을 연기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조정에 '토카이, 히가시야마, 호쿠리쿠의 코쿠가(国衙)[각주:1]와 장원을, 원래 주인인 쿠니시(国司)에게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려 주도록 요청합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겐페이 쟁란이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각지에서 연공이 닿지 않아, 귀족들은 곤란해하고 있었습니다. 토카이나 호쿠리쿠는 기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명령을 시헹되면 기근이여도 걱정이 없는 고시라카와 법황과 귀족들은 이것을 매우 반깁니다. 조정은 정중하게 '이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요리토모가 군세를 이끌고 강제로 실행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명령을 발포합니다.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서 피한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조정의 인가를 받은 것', '미나모토의 대장인 것', '진군의 대의명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토의 귀족들의 신망'을 모두 손에 넣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후에 그의 남동생인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를 총대장으로 군세를 일으킬 명분을 얻은 것입니다.

  1. 나라의 영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