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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고시라카와 덴노의 호주지덴 방화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키소노 요시나카, 고시라카와 덴노의 호주지덴 방화



 지에이 2년(1183년) 11월 18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고세 호주지덴(法住寺殿)에 방화해,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유폐 했습니다. 



요시나카의 호주지덴 방화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그대로 여세를 몰아 호쿠리쿠를 공격하는 타이라 가문을 구리가타토우케 전투(구리가타토우케 전투)에서 대패시켜, 그대로 교토까지 들어갑니다.(키소노 요시나카 입경) 타이라 가문은 이미 교토에서 도망친 뒤였습니다.(타이라 가문, 수도를 빠져나가다)

타이라 가문이 빠져나갈 때는 히에이잔에 몸을 숨겨 요시나카의 도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고시라카와 법황이었지만, 키소 태생으로 교토의 관례를 모르고 무례한 행동을 한 요시나카를 보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는 은밀히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부르고 요시나카에게 '타이라 추토의 선지'를 내립니다. 물론, '타이라 가문이 수도를 탈환하러 온다'는 소문이 퍼진것도 한 이유였습니다. 요시나카는 책략에는 능하지 않은 인물이여서, 수면 아래의 공작을 눈치채지 못하고 타이라 토벌을 위해 출발합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법황과 교섭해, 카마쿠라에 앉은 채로 우효우에노스케(右兵衛佐)에 복귀해, 겐지(源氏)의 동량 자리를 획득했습니다. 한편 요시나카는 세력을 만회하고 있는 타이라와 빗츄 미즈시마에서 대패하고 돌아옵니다.(미즈시마 전투) 돌아온 그를 맞이하는 것은 법황과 요리토모가 획책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를 알게된 요시나카는 격노하며, 법황에게 '요리토모 토벌의 명령'을 내려달라 합니다. 하지만 법황은 요리토모의 편, 이런 명령을 내릴 리가 없습니다. 이로 인해 키소노 요시나카의 세력은 서쪽으로는 타이라 가문의 잔당이, 동쪽으로는 가마쿠라에 눌러앉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포위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갈수록 키소노 요시나카와 고시라카와 법황의 갈등은 심해집니다. 이윽고, 법황이 '다시 한번 타이라 토벌을 하시오. 타이라를 제대로 토벌할 때까지 교토로 돌아오지 마시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요시나카의 분노는 폭팔합니다. 그는 결국 지에이 2년(1183년) 11월 18일, 덴노가 사는 고세 호주지덴을 공격하여 불을 질러 절을 태우고,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합니다. 이제 요시나카와 조정의 균열을 수복이 불가능하게 악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