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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6) 이치하라 전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6) 이치하라 전투



지쇼4년(1180년) 9월 7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이치하라 전투로 첫 출진을 장식했습니다.



키소(미나모토)노 요시나카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 키소의 나카하라노 카네토오(中原兼遠)에게 몸을 의지한 쿠왕(駒王)은 일족의 따뜻한 비호 아래, 무럭 무럭성장해, 원복한 뒤 키소노 지로우 요시나카(木曽次郎義仲)라고 자칭했습니다. 이 지쇼4년(1180년) 5월에, 요시나카에게도, 모치히토왕(以仁王)의 영지가 도착했습니다.(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 전에 모치히토왕은 우지바시 전투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졌습니다.(우지바시 전투) 이윽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8월 17일에 야마키 저택을 기습하고 승리를 거두었다은(요리토모 발기) 요시나카는 여기에 자극되어 군세를 일으킬 결의를 합니다.


 그는 카네토오에게 결의를 말했습니다. '요리토모는 이미 군사를 일으켜, 관동8개국을 따르게 해 토카이도를 올라 타이라 가문을 쫓아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요시나카도 히가시야마, 호쿠리쿠를 따르게 해 하루라도 빨리 타이라를 공락해, 일본에 두 명의 영웅이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습니다.'라 합니다. 이것을 은 카네토요는'이 날이 온다고 생각했었다. 과연 하치만타로우(八幡太郎)의 후예구나!' 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요시나카의 아버지는, 요시토모의 형 요시히라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아무리 같은 미나모토 가문이라도 원수의 동생인 요시토모에게 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조속히 시나노의 무사들에게 타이라 토벌을 호소하는 격문을 돌립니다. 그러자 네노이노 코야타(根井小弥太), 우미노 유키치카(海野幸親), 야다노 키요시(矢田義清)등이 달려 와, 금새 군사는 천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그와 함께자란 나카하라의 히구치 카네미츠(樋口兼光), 이마이 카네히라(今井兼平) 형제도 더해지고 있습니다. 호죠 가문이 요시토모를 받들고 가명을 준 것처럼, 이 나카하라 가문도, 이 젊은 미나모토의 대장에게 일족의 운명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키소 골짜기에 불온한 움직임이 서기 시작한 일은 곧바로 타이라측의 호족 카사하라 요리나오(笠原頼直)에게 알려져, 곧 토벌군이 만들어집니다. 이 일을 안 키소측의 무라야마 요시나오(村山義直)와 쿠리타지 별당 대법사 한카쿠(範覚)가  이치하라에서 적과 맞서려 합니다. 그러나, 요리나오는 숙련된 노장입니다. 이에 키소측은 고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요시나카가 천을 넘는 군세를 거느리고 참전하자 전투는 눈 깜작할 정도로 쉽게 승리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의 전투는 끝난것이 아니니, 요코타 강변의 전투가 남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