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7)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방문
지쇼4년(1180년) 10월 6일, 이시바시산 전투에서 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재흥을 위해 가마쿠라에 들어가,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가마쿠라의 위치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 져서, 이즈의 하루카고시마(蛭ヶ小島)에서 유배중이던 요리토모는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발한 타이라 토벌의 영지(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하다)를 받아 군사를 일으켜 지쇼 4년 8월 17일에는, 야마키 저택을 성공적으로 야습해 출진을 장식하나, 계속 된 이시바시산 전투(이시바시산 전투)에서 져서 산중을 도망다니다, 마나쯔루미사키(真鶴岬)에서 어떻게든 작은 배를 타고, 무사 사냥의 포위망에서 겨우 탈출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키메가사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쳐(키메가사성 전투) 먼저 도착하고 있던 미우라 요시즈미(三浦義澄),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가 맞아들여 카츠야마(勝山) 근처에 상륙한 요시토모는 5일 동안이나 도망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카즈사, 시모우사의 무사들에게 참전을 호소합니다. 그 요청에 응한 것은 치바 쯔네타네(千葉常胤)였습니다.
그가 이끈 3백여기의 군사의 참전에 사기가 올라, 무사시의 국경 스미다가와 부근에 도착했을 무렵, 이번에는 카즈사노 스케히로츠네(上総介広常)가 2만의 대군을 거느려 참전했습니다. 사실 스케히로츠네는 요리토모의 모습을 보고 거취를 결정하려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요리토모는 '참가하는 것이 왜이리 늦었습니까!'라며 되려 역정을 냅니다. 2만의 대군을 데려와 위축될만도 한데 오히려 역정을 내는 그의 모습에 '이 사람의 그릇이 크구나!'를 느낀 그는 요리토모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요리토모는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당근과 채찍에 매우 능했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렇게 점차 세력이 결집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머무는 가마쿠라는 관동 제일엔의 동국의 무사들을 따르게 하는 동량이 되어 갑니다. 평소부터 아버지 요시토모(義朝)의 관적이기도 한 연고지 가마쿠라에 거처를 정하도록 진언한 치바 쯔네타네의 말을 듣고 요리토모는 가마쿠라를 자신의 본거지로 하는 일을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이시바시산의 패전으로부터 불과 1개월 남짓 지난 지쇼 4년(1180년) 10월 6일, 당당하게 가마쿠라 들어간 요시토모의 군세는 이미 5만의 대군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날, 이즈에서 호조 마사코(北条政子)가 도착해 그들은 정식 부부가 됩니다. 하지만 기뻐할 새는 없습니다. 이 소식은 일본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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