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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9) 킨사죠 공방전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9) 킨사죠 공방전



 지쇼4년(1180년) 11월 4일, 후지가와 전투에 이어 겐페이 전투로 킨사죠 전투(金砂城の戦い)가 발발했습니다. 


 전년의 11월에 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는 '지쇼 3년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결행해,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 하고 그의 원정을 멈춘 뒤에 법황의 신하나 관백 이하 공경 39명을 해임해 버렸습니다. (지쇼 3년의 정변) 이에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다음 해의 4월에 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해(타이라 토벌의 영지) 8월 영지를 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깁니다.(요리토모 발기관동지방에서 반 타이라를 부르면서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정했기 때문에, 키요모리는 스스로의 적손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지휘관으로 한 요리토모 토벌군을 관동에 파견했습니다. 이 양자가 부딪친 것이, 지쇼 4년(1180년) 10월 20일의 후지가와 전투(후지가와 전투)입니다. 



카즈사노 스케히로츠네



 요리토모가 직접 대결한 것은 아니었지만, 타이라 군이 철퇴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요리토모는 한층 더 추격할 생각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을 멈춘것이 스미다가와(隅田川) 부근에서 요리토모군에 참가한 카즈사노 스케히로츠네(上総介広常)가 일단 군세를 멈춥니다. 그리고 일단 히타치의 사타케(佐竹)를 공격하도록 전언했습니다. 사타케는 미나모토 가문의 후예 중 하나인 명문입니다만, 타이라 가문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타이라 가문에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미나모토 가문이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서 몰락하자 어쩔 수 없이 타이라 가문에 귀이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통치방식은 '현재 지배하는 영지를 보전, 인정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명문인 사타케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타케의 당주인 사타케 타카요시(佐竹隆義)는 교토에서 타이라 가문을 시중들고 있어 영지는 그의 아들 사타케 히데요시(佐竹秀義)가 맡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사타케 가문은 조정이며, 덴노의 측근인 것으로 조정의 편이기에 제멋대로 영지를 허가해 주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괘씸해 보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타카요시의 어머니가 오슈 후지와라 가문의 초대 후지와라노 키요히라(藤原清衡)의 딸이 었기에, 사타케 가문에게는 '관동 이북은 우리의 관할이다'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킨사죠



 이 사타케 가문과 소우마(相馬)의 영유권을 두고 싸웠던 것이 간무 타이라(桓武平)의 유파를 이어받는 치바 가문이었습니다. 치바 츠네타네(千葉常胤)는 재빨리 요리토모에게 합류한 이들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사타케 가문은 적대해야 할 가문이었습니다. 요리토모는 처음에 사타케를 대화를 핑계로 꾀어내 죽이려는 계책을 세웠지만, 사타케 히데요시는 이를 깨달고 킨사죠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합니다.그런데 그의 형인 사타케 요시마사(佐竹義政)는 이 권유를 받아 국경까지 나갑니다. 국경을 흐르는 소노베가와(園部川)까지 나아가, 그곳에 있는 오야바시(大矢橋)에서 토벌되어 버립니다. 그가 죽은 소식은 금새 퍼져, 킨사죠 내에는 '사타케는 몰살 당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자 사타케 내부에서도 항복하려는 이들이 나오게 됩니다.


 지쇼4년(1180년) 11월 4일, 전부터 요리토모가 교섭을 걸고 있던 사타케 요시스에(佐竹義季)가 요리토모 측으로 배신하게 됩니다. 그는 당주 타카요시의 남동생으로, 킨사죠의 방비를 맡고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 일에 성공한 요리토모는 조속히 킨사죠 총공격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킨사죠는 절벽에 세워진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성입니다. 적의 방비는 단단했습니다. 하지만, 요리토모의 안내에 의해 킨사죠에 손쉽게 침입한 요리토모군은 아치 싶은 사이에 안쪽에 안쪽으로 진군해 나갑니다. 결국 부득이 사타케 히데요시는 성을 탈출해 무츠로 도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