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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0) 후쿠하라 천도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0) 후쿠하라 천도



지쇼4년(1180년) 11월 26일,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결단에 의해 후쿠하라(福原)에서다시 교토로 천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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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이라의 위치


 제 80대 다카쿠라덴노(高倉天皇)에게 시집간 딸 토쿠코(徳子)가 차기 덴노인 사내 아이를 낳아, 영화의 정점에 닿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였지만 이 때를 정점으로 내리막길로 걷기 시작합니다. 키요모리의 독재에 조정은 서서히 불만을 드러내 오기 시작합니다.  이 지쇼4년은 일본 역사의 변환기였습니다. 전년 지쇼 3년(1179년) 8월 1일, 키요모리의 폭주를 멈추는 브레이크의 역할을 하던 키요모리 아들 시게모리(重盛)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번 중병을 겪은 키요모리는 후쿠하라에 별장을 지어 아들들에게 정무를 맡기고, 반 은거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헤이안쿄(平安京)에 있는 고시라카와 법황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게모리가 죽은 뒤 11월, 키요모리는 군사를 인솔하고 교토에 돌어와, 법황을 유폐 하고 그의 원정을 멈추게 합니다.


 파란의 지쇼4년(1180년) 새해가 된지 얼마되지 않아, 키요모리는 다카쿠라 덴노를 퇴위 시키고, 딸 토쿠코가 낳은 자신의 손자를 3세인데도 불구하고 안토쿠덴노(安徳天皇) 즉위 시켰습니다. 이렇게 되자  조정이나 공가는 물론, 지방의 무사나 사원까지도 키요모리에게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합니다. 5월에는 드디어 불만이 폭발해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3 황태자 모치히토왕(以仁王)이, 키요모리 토벌의 영지(키요모리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와 함께, 타이라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비록 그는 우지바시에서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우지바시 전투) 



후쿠하라 천도 그림



그 다음달 6월 2일에, 키요모리는 자신이 살고 있던 후쿠하라로 수도를 천도했습니다. 이것은 키요모리 자신의 이상의 수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해상 교통을 정비하고, 후쿠하라에서 활발히 송이나 고려와의 교역을 하고 있던 키요모리는 나라의 거점을 여기에 두어 자신이 생각하는 나라를 만드려 했습니다. 일찌기 간무 덴노(桓武天皇)가 헤이조쿄(平城京)에서 수도를 옮겨,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을 따라 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키요모리가 마음에 그리고 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2개월 후의 8월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요리토모 발기), 계속 되는 9월에는, 키소노 요리나카(木曽義仲)가 호쿠리쿠에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요리나카 발기) 


 이에 10월에는 요리토모를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인솔해 향하지만, 후지가와 전투(후지가와 전투)에서 타이라 가문은 대패해 버립니다. 게다가, 11월에 들어가자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사무라이 도코로(侍所)[각주:1]를 설치하고, 이미 새로운 막부의 준비를 개시합니다.(가마쿠라에 들어가다) 간신히 새로운 수도인 후쿠하라에서 10월 17일에 궁중 행사등의 황실 교지를 실시했지만, 그것이 끝나자 많은 문신들은 후쿠하라에 머무르지 않고 헤이안쿄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결국 지쇼 4년(1180년) 11월 26일 키요모리는 채 반년이 되지 못한 채 수도를 다시 되돌리게 되었습니다.

  1. 경찰서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