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사를 일으키다
지쇼4년(1180년) 8월 17일, 이즈에 유폐 되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 져 아버지 요시토모(義朝)를 잃은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3세 때였습니다. 그도 이 싸움에는 출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잡힌 이상 맏형 요시히라(義平)와 같이 목이 베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대장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어머니 이케노젠니(池禅尼)가 잃은 아들과 얼굴 생김새가 비슷한 요리모토를 '어떻게든 생명만은 살려 주면 안 되겠니'라며 키요모리에게 신신 당부해 목숨을 보전해 이즈로 유폐됩니다. 그 이래로 군사를 일으키는 이 지쇼4년(1180년)까지의 20년간, 그는 하루카고시마(蛭ヶ小島)에서 이토 우스케치카(伊東祐親)와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의 두 명의 감시를 받게 됩니다.
유배되어 있어도 젊음은 젊음인데다 그는 꽤 잘생긴데다 걸물이여서, 결국이라고 해야할지 이토와 호조 양 가문의 딸에 손을 대어 버립니다. 이토 우스케치카가 교토에 있을 무렵, 딸인 야에히메(八重姫)와 운우지정을 나누어 될테로 되라며 이토 가문의 집에 신방을 틀어버린 부부는 아들 치즈루(千鶴)를 낳아 지냈습니다. 하지만 우스케치카는 돌아와 매우 분노하여 치즈루를 죽이고 요리토모를 내쫓아 버립니다. 그리고 야에히메는 근처의 적당한 호족과 억지로 결혼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호조의 관으로 도망칩니다.
희대의 바람둥이 요리토모
여기서 그는 또 호조 도키마사의 딸인 마사코(政子)에 손을 댑니다. 처음에야 반역자와 사귀는 딸을 반대했겠지만 아비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만나러 가자 포기한 것 같습니다. 또는 '타이라 키요모리의 세상이 천년만년 계속될리도 없다'라고 생각한 것도 없잖아 있었겠지요. 이윽고 이즈, 사가미, 스루가 주변의 무사들이 요리토모의 집에 출입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모치히토왕이 쓴 영지가 닿았습니다.(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하지만 이윽고 모치히토왕은 우지바시 전투(우지바시 전투)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요리토모의 주변의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되면, 키요모리에게서 생명이 표적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오슈로 도피하는 것은 어떨까'라는 경고를 날립니다. 이즈 모쿠다이(目代) 1 야마키 카네타카(山木兼隆)도 명령만 있다면 그를 토벌하러 올 것이 틀림 없었습니다. 요리토모는 5일 후 결단을 내립니다. 도망이 아닌 발기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요리토모는 6월 24일에 관동의 무사에게 참전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호조 도키마사역시 타이라에 반기를 들 결의를 굳힙니다. 일설에는 종종 요리토모를 만나러 왔던 승려 몬가쿠(文覚)의 지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쇼 4년(1180년) 8월 17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인솔하는 군세는 어둠을 틈타 야마키관(山木の館)을 둘러싸 야습을 가합니다. 이 날은 미시마 신사(三島神社) 제례의 날로, 대부분의 사람이 제사에 참가하고 있었기에 관의 방비는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이즈의 밤하늘에는 앞으로의 전란을 알리는 미나모토의 깃발만이 흔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 정식으로 임명된 사람 대신에 현지에 가서 집무하던 사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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