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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4) 이시바시산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4) 이시바시산 전투



 지쇼 4년(1180년) 8월 23일, 이시바시산(石橋山)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타이라 가문의 오오바노 가게치카(大庭景親)가 격돌했습니다.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져 아버지 요시토모(義朝)를 잃은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3세 때였습니다. 그도 이 싸움에는 출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잡힌 이상 맏형 요시히라(義平)와 같이 목이 베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대장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어머니 이케노젠니(池禅尼)가 잃은 아들과 얼굴 생김새가 비슷한 요리모토를 '어떻게든 생명만은 살려 주면 안 되겠니'라며 키요모리에게 신신 당부해 목숨을 보전해 이즈로 유폐됩니다. 그곳에서 힘을 기른 그는 모치히토왕이 쓴 영지를 받고(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고민끝에 군사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미 모치히토왕의 세력은 우지바시 전투(우지바시 전투)에서 패배한 뒤였습니다. 빨리 행동을 해야 합니다.



전투를 대비하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젊었기 때문일까요, 후대에 구전되는 요리토모와 다르게 이때의 모습은 무계획적이고 돌발적입니다. 8월 23일의 아침부터 타이라 가문의 습격에 대비해, 산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언덕과도 같은 이시바시산의 산상에 진을 쳐, 창을 울타리와 같이 세워 벽을 만들고, 산의 나무를 베어 쓰러뜨려 바리게이트로 삼아, 적을 맞아 싸우려 합니다. 나중에, 미우라(三浦)의 원군이 오게 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3백기뿐인 군세가 지키기에는 이 낮은 이시바시산은 요충지라고 부를 수 있는 요충지가 아닙니다. 처음의 야마키 공격은 밤에 시행한 기습 작전이었기 때문에, 이런 전투한다운 전투는 요리토모에 있어서 처음입니다. 


 게다가, 이 날은 낮부터 흐렸던데다, 해가 지고 호우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대립하는 오오바노 가게치카 어둠을 틈타 3천의 군사로 이 이시바시산을 포위합니다. 계획으로는 내일 아침부터 공격을 실시할 생각이었지만, 흐린 날씨를 보고, 밤 동안에 공격을 실시하는 결단을 합니다. 멀리서 퍼지는 연기를 보고 요리토모의 원군으로 이곳을 향하고 있는 미우라군이 저녁 때에 사카와가와(酒匂川)의 오오바 측의 가옥을 불태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입니다. 내일까지 기다리면, 그 군세가 이 곳까지 올 것이기 때문에 기습을 하는게 나은 선택이 된 것입니다.


이시바시산 전투를 그린 그림


 지쇼4년(1180년) 8월 23일 3천기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전투의 포문이 열렸습니다. 산을 단번에 뛰어 오르는 타이라 가문의 군세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군은 창의 울타리를 뛰어넘고 산을 달려 나와 양군은 산의 중턱에서 부딪칩니다. 싸움은 새벽녘 근처까지 계속 되었습니다만, 3백으로는 도저히 3천을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요리토모에게 승산은 없었습니다. 결국 요리토모는 불과 5~6기를 지니고 패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리토모는 여기서 죽음을 각오한 것 같습니다만, 가신들의 '후일을 도모하자'는 의견에 나무뿌리의 큰 구멍안에 숨었습니다.


요리토모를 구하는 카지와라 카게토키


 당연하게도 그를 수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결국, 요리토모와 그의 가신들은 적의 정찰병과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모두 칼에 손을 대고 목숨을 걸 각오를 할 때, 그 정찰병이 소리칩니다. '오오바노님! 이곳에 요리토모는 없습니다. 이곳으로 도망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멍해져 그 남자를 바라보는 요리토모 일행에게 그 남자는 '후일 미나모토가 승리한 날에, 저를 잊지 말아주십시오.'라며 살짝 웃고 돌아가 버립니다. 이 남자가 바로 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오른팔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지지하는 카지와라 카게토키(梶原景時)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