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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5) 키메가사성 공방전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5) 키메가사성 공방전



지쇼4년(1180년) 8월 27일, 키메가사성(衣笠城) 공방전에서, 성을 점령당한 미우라의 당주 미우라 요시아키(三浦義明)가 전사 했습니다. 



미우라 요시아키 그림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 져 유배당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요인은 '귀족화된 타이라 가문에 대해, 반도우(坂東) 타이라라 불리는 관동의 무사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라던가, '타이라 가문 중심의 압정에 지방 무사들의 불만이 정점으로 달했다.' 라던가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일련의 겐페이 전투를 보면, 마나모토의 후계자에게 붙은 동국의 무사들이, 멸망해 가는 타이라 가문에 압승한 것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별로 승산이 없는 가운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능력과 운에 의한 것이 컸습니다.


 지쇼 4년(1180년) 8월 17일의 요리토모가 군사를 일으키자(요리토모의 발기), 이에 재빨리 찬동 한 것이 미우라 요시아키와 그 일족입니다.  키메가사성을 거성으로 해, 미우라 반도 일대를 지배하고, 주위의 해상권도 잡는 관동 굴지의 호족입니다. 그렇지만, 요시아키는 이 때, 벌써 89세입니다. 당연히 스스로 선두에 설 수는 없고, 아들인 요시즈미(義澄)나 요시츠라(義連), 손자인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 등 일족의 총력을 빌어, 결전 장소인 이시바시산으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나, 때마침 호우가 내려 사카와가와(酒匂川)가 범람했습니다. 이에 진군이 느려진 미우라 군에게 들려온 소식은 다름 아니라 이시바시산 전투에서 요리토모가 대패했다는 것이었습니다.(이시바시성 전투)



미우라 요시아키의 묘



 이에 미우라군은 부득이 키메가사성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거기서 조우한 것이, 타이라 측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였습니다. 양자는 유이가하마(由比ヶ浜)에서 격돌합니다. 미우라 군세 300기에 대항하는 하타케야마의 군세 500기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망자를 내면서도 승리해 어떻게든 키메가사성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시게타카는 근린의 호족을 규합해 키메가사성으로 쳐들어 가게됩니다. 당연 맞아 싸울 각오를 한 미우라군 입니다만, 이미 유이가하마에서의 사투로 모두 피곤한 상태인데다가 화살도 다 써 버려, 이미 패전의 색은 짙어질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성을 지키다 전사할 각오를 한 아들들에게 요시아키는 탈출을 권합니다. '탈출해,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요리토모공을 도와라' 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울면서 아버지를 두고 탈출하는 아들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호조 가문이 집필한「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있는 이야기로, 「타이라 가문 이야기(平家物語)」에서는 늙어서 거치적거리는 요시아키를 방치해 일족이 탈출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키메가사성은 맹공격을 받아 함락됩니다. 한편 아들들은  5일간 산중을 방황하다가 이시바시산에서 해안에 가까스로 도착한 요시토모 해상권을 풀로 활용해 조력합니다.  머지 않아 가마쿠라에서 재기한 요시토모와 함께, 타이라 토벌에 참전한 미우라 가문은 타이라 토벌 뒤에 요시즈미는 사가미 수호직에, 요시츠라는 사무라이도코로 벳토(侍所別当)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미우라 가문은 실로 엄청난 출세를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