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 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지쇼4년(1180년) 4월 9일,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3 황태자 모치히토왕이 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했습니다.
헤이지 원년(1159년)의 12월에 발발한 헤이지의 란은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대승리로 끝났습니다. 적의 손에 떨어지고 있던 니죠 천황과 후 시라카와 법황을 구조해 낸 일로 신망을 얻은 타이라 가문은 일본의 패자가 됩니다. 8년 뒤 닌안 2년(1167년)에는 50세로, 태정관까지 오른 키요모리(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이때의 타이라 가문은 공경 16명, 4~5품 이상의 당상관 30명 등 에다가, 일본의 거의 절반의 수령, 궁중 경비, 제사까지 맡는 전대미문의 영화를 누려, '타이라 가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 하고 싶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당대의 패자, 타이라노 키요모리
다음 해에는, 니죠덴노(二条天皇)의 황태자로, 그 뒤를 잇고 천황이 되어 있던 로쿠조덴노(六条天皇)를, 불과 5세에 퇴위 시키고, 불과 8세의 다카쿠라덴노(高倉天皇)를 즉위 시킵니다. 여기서, 가장 큰 불만을 가진 것이 제3 황태자인 모치히토왕(以仁王)입니다. 로쿠조덴노가 지나치게 쉽게 쓰러진 것은 그의 아버지인 니죠덴노가 병으로 쓰러지자 마자 당황해서 아들을 덴노로 세웠습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급한 승계는 다름아니라 자신의 아버지 고시라카와 법황과 타이라노 시게코(平滋子)의 아들이 탄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노력도 부질없이 끝나고 결국 로쿠죠덴노가 즉위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렇게 되자 완전히 차례가 넘어오지 않은 것이 모치히토왕입니다.
하지만 외가의 신분이 좋지 않은 모치히토왕은 어떤 행동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다카쿠라 덴노의 중궁으로 키요모리의 딸 토쿠코(徳子)가 정해지기에 이르자, 고시라카와 법황이나 주위의 귀족들이 인내력의 한계에 달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 밤마다 시시가타니 가까이의 관에 모여, '타도 타이라'의 기치를 들다 토벌되어 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시시가타니 음모) 이 사건이후로 오히려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권세는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평생가는 권력은 없는 법, 2년 후의 지쇼 3년(1179년) 8월에 시게모리가 죽고 나서, 불과 2개월 후의 11월 키요모리는 돌연 머무르던 후쿠하라(福原)에서 군사를 인솔하고 상경해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고, 귀족이나 관리 약 40명을 해고해 버립니다.(지쇼3년의 정변)
타이라의 세상에 반기를 든 모치히토왕
그리고 그 다음 해의 지쇼4년(1180년)의 2월에, 다카쿠라덴노를 무리하게 퇴위시켜, 덴노와 자신의 딸 토쿠코의 사이에서 태어난 불과 3세의 손자 안토쿠덴노(安徳天皇)를 제81대 덴노로 즉위 시킵니다. 모치히토왕은 또다시 덴노 계승 순위에서 멀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내하던 모치히토왕도 더이상 참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것이 바로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였습니다. 헤이지의 란에서도 움직이지 않아, 타이라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얼마안되는 미나모토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군을 얻은 모치히토왕은 지쇼4년(1180년) 4월 9일, 각지의 반 타이라 세력에 향해 '타이라 토벌의 영지(令旨)를 발했습니다. '토카이, 히가시야마, 호쿠리쿠3도의 미나모토 가문과 군사들이여, 빨리 키요모리를 위시한 반역 도배를 토벌하라'고 명합니다. 타이라 가문은 모두 역적 가문이며, 모치히토왕이야 말로 정당한 덴노 계씅자로,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역도로 판단하겠다는 강한 어조의 격문이었다고 합니다. 전국 각지에 이 격문을 뿌린 것은 헤이지의 란때 쿠마노 신사(熊野神社)에 숨어 있어 살아 남았던 신쿠쥬로우(新宮十郎) 미나모토노 요시시게(源義盛)였습니다. 그는 이름을 유키이에(行家)로 바꾸고 오미, 미노, 오와리를 돌고 이즈에 유폐되었던 요리모토(頼朝)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미나모토노 요리모토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타이라 가문에게 금새 파악되고 맙니다. '신큐쥬로우'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쿠마노 신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 쿠마노 곤겐(熊野権現)의 승병의 도움을 받으려 하나, 쿠마노 신사 본궁의 오오에노 호우겐(大江法眼)은 타이라 집안의 기도를 맡고 있는 타이라의 인물이였습니다. 코우카의 이런 행동이 발각되어 위기에 빠진 모치히토왕은 5월 15일 간단한 채비로 탈출해 어둠을 틈타 미이데라(三井寺)로 도망쳤습니다. 이 때문에 각지의 반 타이라 세력이 완전히 연합하지 못한채 5월 26일 우지바시(宇治橋)에서 타이라와 전투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겐페이 전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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