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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시시가타니의 음모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시시가타니의 음모



지쇼 원년(1177년) 5월 29일, 타카히로(俊寛)의 산장에서 행해지고 있던 타이라 가문 타도 집회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출석해 후에 '시시가타니의 음모'라고 칭해지는 회합이 열렸습니다.


 원래 닌안2년(1167년)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급작스런 승진으로 태정관으로 취임(키요모리의 태정관 취임) 하고 나서는 그 힘은 더욱 커져, 교토에서는 머리카락을 짧게 잘르고, 붉은 줄을 드리운 '카부로(禿童)'라고 불리는 15~16세의 소년들 300명 정도가 돌아다니며 타이라 가문에 반발하는 사람이나 욕을 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토 도처를 걸어 다니며, 반발하는 사람을 찾아내서 저택에 침입해 재산을 몰수하고 욕한 본인을 잡아 로쿠하라(六波羅)에 인도한다고 하는 비밀경찰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토에서는 그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치를 떨고, 길에서도 피해다녔다고 합니다. 


 당연하게도 교토에서는 많은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다이난고(大納言)를 제수받고 있던 후지와라노 나리치카(藤原成親)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결원이 생긴 사다이쇼(左大将)를 노리고 있었습니다만, 키요모리의 명령에 의해, 우다이쇼(右大将)이였던 키요모리의 장남 시게모리(重盛)가 사다이쇼가 되고, 우다이쇼에는 삼남 무나모리(宗盛)가 고작 츄난고(中納言)에서 벼락 출세를 해 버렸습니다. 물론, 그 이외에도 타이라 이지만 주류가 될 수 없었던 타이라 야스요리(平康頼)나, 후지와라 가문의 복권을 바라는 후지와라 나리쯔네(藤原成経), 앞의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서 처참히 죽은 신제의 유모의 아이인 세이코우(西光)등이 공모를 하게 됩니다.



시시가타니의 음모



 결국 이들은 홋쇼지(法勝寺)의 슈교우(執行)[각주:1] 타카히로(俊寛) 법사의 시시가타니 산장에 모여 밤마다 타이라 가문 타도를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 29일 그 회합의 장소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스스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원래 고시라카와 법황은, 키요모리의 무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고,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이름을 빌어 권력을 얻어가는 상부상조의 관계였으나, 키요모리는 서서히 법황을 경시하게 되어 관계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신제의 아들 죠우켄호우인(浄憲法印)은 이 집회에 초대받아 타이라를 타도하려는 세력이 이렇게 있는 것에 깜짝놀랍니다. 


 연회의 모습을 「타이라 가문 이야기(平家物語)」에서 발췌해 보여 드리겠습니다.


 연화가 무르익을 무렵, 죠우켄호우인은 후지와라노 나리치카에게 말을 겁니다. 


'여러분의 기분을 잘 알겠으나, 이런 천하의 중대사를 경솔히 이야기 하면 어디서 분명히 샐 것이외다.'


이 말을 듣고 안색이 어두워진 나리치카는 일어나다 헤이시(瓶子)[각주:2]가 소매에 걸려 넘어뜨려 버립니다. 이를 본 코시라카와 법황이 쳐다보았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헤이시가 넘어졌습니다.'


그러자 법황은 크게 웃었습니다. 헤이시는 타이라씨(平氏)를 다르게 읽은 발음인 것이기 때문에, '헤이시를 넘어뜨렸다.'라는 것을 '타이라 가문을 넘어뜨렸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타이라 야스노리(康頼)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습니다.(그는 타이라 가문의 사람이지만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이었습니다.)


'아~아! 헤이시가 너무 많아서 취해버리겠구만!'


 그러자 타카히로와 세이코우가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시끄럽다. 이 넘어진 헤이시로도 충분하지 않는가?'

 

'역시 목을 베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헤이시의 병목을 베어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음모에 가득찬 무서운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하지만 확실히 모략도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승려나 귀족 중심의 현재 상태로서는, 무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북쪽의 무사 타다 유키쓰나(多田行綱)를 아군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 위기가 됩니다. 군사에 정통한 유키쓰나가 보기에 그들의 작전은, 도저히 성공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공상뿐인 작전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계획에 이름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있었다면 자신또한 토벌될 것이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니시하치죠우관(西八条の館)으로 향해 일의 전말을 밝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격노한 키요모리는 그들을 모두 체포해 버립니다. 세이코우는 고문의 끝에 참수당하고, 나리치카는 비젠으로 유폐된 뒤에 처형당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제일의 대텐구'라고까지 불린 고시라카와 법황은 죄를 피해갔습니다. 「타이라 가문 이야기」에 따르면, 고시라카와덴노도 잡으려한 키요모리를, 그의 아들 시게모리(重盛)가 


忠ならんと欲すれば孝ならず、孝ならんと欲すれば忠ならず、重盛の進退ここに極まれり

충을 바라면 효를 이루지 못하고, 효를 바라면 충을 이루지 못하니, 이 시게모리는 여기서 진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위의 책은 시게모리를 상당히 미화한 책으로, 실제로는 고시라카와 법황이 이미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 둔 것이 아닌가 합니다.

  1. 절의 사무를 맡는 상위 승직입니다 [본문으로]
  2. 술병 [본문으로]